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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내셔널리즘 현장을 가다] <4> 투자와 안보, 정면 충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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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내셔널리즘 현장을 가다] <4> 투자와 안보, 정면 충돌하다

입력
2008.07.01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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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국 막고 산유국 뚫고 '국경없는 쩐의 전쟁'

서구 경제학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 중에 '글로벌 불균형'이란 말이 있다. 서구가 주도하는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선진국은 채무국으로 전락하고, 신흥공업국이나 산유국은 채권국으로 부상한다는 내용이다. 1990년대 이후 폭발적인 수출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는 중국 인도와 천문학적인 오일달러로 무장한 중동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후진국은 선진국을 위한 원료공급과 상품 소비자의 처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80년대의 종속이론도 '글로벌 불균형' 논리에서는 폐기된 지 오래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과거 침탈구조를 뒤바꾼 제1의 무기는 국부펀드이다. 신흥공업국과 산유국들의 국부펀드를 통한 대 선진국 투자는 2000년 30억달러에서 지난해에는 920억달러로 수직 상승했다. 올해 1분기에만 580억달러를 기록했다.

국부펀드를 보는 선진국들의 심정은 복잡하다. 오랫동안 공고히 유지돼온 자본수출국에서 자본수입국으로 지위가 바뀌면서 이들의 '세계화'에도 혼란이 일고 있다. 엄밀한 의미의 국부펀드는 아니지만 두바이포트월드는 2006년 미국 동부항만 운영권 인수를 추진했다 국가 기간시설을 외국, 그것도 이슬람권에 넘길 수 없다는 미국 의회의 강력한 반발에 막혀 인수가 백지화됐다.

2005년 중국해양석유(CNOOC)의 미국 석유회사 유노칼 인수, 올해 3월 중국 통신업체 화웨이의 쓰리콤(3Com)인수도 국가안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됐다. 세계화의 주창자인 미국이 세계화의 핵심인 국경간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로버트 키미트 미국 재무부 부장관은 올해 초 다보스 포럼에서 "국부펀드의 성격상 민족주의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부펀드의 움직임이 보다 투명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부펀드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세계화의 투명성을 희생할 수 있다는 옹색한 논리에 다름 아니다.

3Com 인수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3대 국부펀드 중 하나인 '무바달라 개발회사'는 미국 반도체 업체인 AMD의 지분인수 작업을 잡음 없이 성사시켰다. 하지만 배경을 보면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사직 요구 같은 경영권 참여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약한 뒤에야 OK 사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와힙 아메드 알아타르 아부다비 국립은행 대외투자 협력부문 책임자는 "아부다비는 국부펀드를 어떤 경우에도 외교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고, 운용의 투명성 역시 세계 모든 금융 기관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말로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아부다비 국부펀드의 대명사인 아부다비투자청(ADIA)은 운용자산 규모면에서 2위인 싱가포르투자청(3,500억달러)을 2배 이상 앞서는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ADIA를 비롯한 아부다비의 국부펀드들이 해외에서 운용중인 자산의 규모가 1조달러를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ADIA는 지난해 11월 유동성 위기에 빠진 세계 최대 시티은행에 75억달러를 투자하면서 4.9%의 지분을 취득, 최대주주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ADIA에서 분리된 아부다비투자위원회(ADIC)가 뉴욕 맨해튼의 상징인 크라이슬러센터 인수에 나서며 또한번 화제를 뿌렸다.

그러나 아부다비의 이런 영광도 "국부펀드 투자를 정부의 정치적 목적 달성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집요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이는 싱가포르투자청도 마찬가지이다.

아부다비에서 만난 한 금융계 인사는 익명을 전제로 "투자자의 투자내역을 제3자에게 공개할 의무가 없다는 것은 금융계의 상식인데, 투자자가 정부라는 이유로 투자 받는 측이 국부펀드의 투자운용 내역 공개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라고 말했다.

유럽 국가들의 국부펀드에 대한 입장은 제각각이다. 독일 정부는 미국의 해외투자위원회와 같은 국부펀드 감시기구의 설치를 검토하는 등 가장 폐쇄적이다. 영국은 기존의 독점방지법에 대한 저촉 여부만을 감시하고 있다. 반면 아무런 제한 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는 프랑스는 신흥국의 국부펀드 투자에 적극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주요 국부펀드와 함께 글로벌 운용 규칙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미국의 무역적자와 달러화 추락이 계속되는 한 국부펀드의 영향력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또 미국이 아무리 슈퍼파워라 하더라도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감 나라 배 나라' 하는 것도 한 두번이다. 이달 초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부펀드의 미국 투자를 환영한다"고 한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의 발언은 세계화의 국제질서가 급변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 금융컨설팅 '모니터 그룹' 보고서

로버트 키미트 미국 재무부 부장관은 "정부가 운용하는 국부펀드는 국경을 넘나들며 출자국가의 국익을 실현하는 '국경을 넘나드는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 주장했다. 급속히 팽창하는 국부펀드의 영향력에 대한 서구 선진국들의 우려를 함축한 말이다. 과연 그런가.

미국 보스턴에 근거를 둔 국제 금융컨설팅 회사인 '모니터 그룹'은 이달 들어 '위험 평가_글로벌 경제에서 국부펀드의 행태'라는 보고서에서 국부펀드의 실체를 비교적 상세히 밝혔다. 국부펀드는 대부분의 경영정보가 극비 사항이어서 모니터 그룹은 1975년부터 2008년 3월 사이 작성된 1,100여건의 공식 국부펀드 거래보고서를 일일이 확인하고, 수많은 펀드 매니저들을 인터뷰했다.

보고서는 "국부펀드가 투자대상국의 경제ㆍ국가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서구의 우려는 과장돼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투자 행태가 과감해지고, 국가의 미래 핵심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한 기술 전수 투자가 늘어나면서 선진국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여 여지를 남겼다. 지금까지는 국외보다는 국내투자에, 고수익보다는 투자의 안정성을 더 중시해 왔지만,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투자행태가 공격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2차 대전 이후 국제 금융의 '지배 그룹'이 그 동안 그룹에서 배제돼 있던 나라들의 영향력이 증가하자 지배력을 상실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 러시아 등 냉전시대 슈퍼 파워들이 잇따라 초대형 국부펀드를 만들고 반미운동의 거점이 된 이란 이에 가세하자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보고서 작성을 총괄한 윌리엄 미라키 모니터 그룹 선임이사는 "국부펀드가 선진국 모임이라 할 수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투자하는 비중은 거래건수별로 31%, 금액비중으로 61% 정도이며, 기업 투자시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50% 이상 투자한 경우도 43%에 그쳤다"며 "국부펀드가 선진국 기업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우려"라고 말했다. 국부펀드도 선진국의 연기금이나 헤지펀드처럼 투자의 안정성과 수익률 제고 사이에 고민하는, 순수한 경제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부다비=정영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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