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경고): 그 남자들의 고백(절대 상상 금물)
“백화점의 여성 속옷 매장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특이한 여성 팬티를 집어 든다. 만져보고 늘여보고 뒤집어보고 느껴본다. 브래지어의 섬세한 레이스, 볼륨을 키우는 소재를 짐작해본다. 거리의 여성들을 힐끗 본다. 속옷 레이스나 라인이 비치면 안 되는데….”
“집안엔 사실상 도색잡지(속옷 카탈로그)가 널려있다. 처음엔 창피했지만 이제 반라의 사진 속 모델들과 대화한다. 싸구려 브랜드나 사이즈에 맞지 않은 컵을 한 것도 금새 알아본다. 포르노 동영상도 피할 수 없는, 아니 놓칠 수 없는 교재다. 정신건강을 위해 가급적 앞부분만 본다.”
“여성 팬티와 브래지어, 거들을 직접 입어본다. ‘여성이 입었다면 뭘 느낄까, 브래지어 컵은 어떤 점이 불편할까.’ 속상하다. 차라리 여자였으면 좋겠다. 신체구조가 다르니 해소되지 않는 욕구만 남는다. 피팅(fitting) 모델에게 물어봐 대리만족을 할 수밖에….”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진다. 고백 남(男)들은 결코 변태나 변태 성욕자가 아니다. 굳이 설명하면 지독한 ‘직업병’에 걸린 것뿐이다. 최고를 지향하는 ‘프로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 속옷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남성 장인(匠人)들. 그들은 소비자가 원하는 최상의 상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억울한 누명도 마다하지 않는다. 도리어 “희열과 보람을 느끼는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여성 언더웨어의 대명사인 ‘비비안’의 상품기획자(MD)인 김한준(35) 과장, 박성대(31) 홍성범(31) 대리를 만났다. 일반인에겐 생소할 법도 하지만 사실 비비안 MD의 70%가 남성이다. 다른 여성 속옷업체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한다.
MD는 매 시즌 컨셉트 설정 등 상품 개발 및 판매 결정에서 생산, 출고 후 재고관리 및 추가생산 여부 등을 총괄 관리한다. 여성 속옷 생존의 전 과정을 남성에게 맡긴 이유가 궁금해진다.
‘객관의 힘’ 때문이라고 한다. 여성 속옷의 디자인은 아무래도 여성 디자이너가 능하지만 이를 소비의 관점에서 트렌드를 읽고 상품으로 개발하는 일은 제삼자인 남성이 유리하다는 것. 한마디로 ‘디자이너는 작품을, MD는 상품을 추구하는’ 셈이다.
홍 대리는 “여성들은 예쁜 스타일과 소재에 손이 먼저 가 제품화가 안 되는 사례가 많고, 설사 제품으로 만들었다 해도 정작 잘 팔리는 상품은 따로 있다”고 했다. 무역학을 전공한 박 대리는 “특이한 아이템이긴 하지만 여성 속옷도 결국 하나의 상품이 나고 지는 과정(기획 분석 자재확보 등)을 거치기 때문에 성별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MD의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MD는 매 시즌 여성 소비자의 욕구 및 트렌드 분석으로 첫 단추를 꿴다. 속옷은 경기에 민감한 터라 향후 경제전망도 따져봐야 하고, 유행할법한 소재(직물 혹은 편물)도 골라야 한다. “볼륨을 강조하는지 편안함을 원하는지, 수정이 먹힐지 진주가 먹힐지, 무늬는 어때야 하는지”(김 과장) 등도 놓쳐선 안 된다. 이 모든걸 균형 있게 조합한 절정의 아이템을 찾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다른 제조분야보다 시즌이 돌아오는 사이클(6개월)이 짧아 애를 먹는다. 홍 대리는 “자칫 방심하면 (MD가) 다음 시즌을 못 따라가 기획단계부터 재고까지 모든 게 엉키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는 해당 시즌 신상품 경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하고, MD에겐 치욕을 안긴다.
200~300개의 속옷업체가 자웅을 겨루는 전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비비안 MD가 매년 두 차례씩 거르지 않고 일본 파리의 속옷 패션쇼를 찾는 것도 아이디어 갈증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목마름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현장 속에 몸을 담그고 교재 속에 파묻혀 공부하는 것 외에는 왕도가 없다.
남 눈치 볼 틈은 없다. 여성 속옷 MD에게 현장은 백화점 등의 속옷 매장, 언더웨어 로드쇼, 거리의 여성들이다. 교재는 도색잡지에 준하는 속옷 카탈로그와 야한 동영상(속칭 ‘야동’)일 수밖에 없다. 남세(남세스러움)도 창피함도 무릅써야 한다.
“입사 초기에 선배가 유럽의 속옷 카탈로그를 한아름 안겨주는데 정말 쑥스러웠다. 비록 야동도 속옷을 걸치고 있는 도입부만 봤지만 여자친구는 직업병이 너무 심하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7년차 홍 대리) “속옷가게에서 브래지어를 뒤지고 있노라면 뒤가 따끔거린다. 내가 지금 뭐하나 하는 자괴가 밀려올 정도로….”(4년차 박 대리)
차츰 내공이 생기자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게 됐다. 더 중요한 것은 풀리지않는 궁금증(속옷을 입을 때 여성이 느끼는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홍 대리는 “우리나라 속옷은 보수적인데 실은 (소비자들은) 굉장히 섹시하고 화려한 걸 원한다”며 “솔직히 섹시한 속옷을 살피려면 야동만한 게 없다”고 귀띔했다.
박 대리는 “이제 속옷가게 유리창 너머 마네킹이 입고 있는 속옷은 꼭 뒤집어보고 만져봐야 직성이 풀린다”며 “심지어 직접 입어보기도 하고, 친한 여자 선후배에게 평소 느끼던 속옷 착용의 장단점을 묻기도 한다”고 했다. 브래지어의 경우 볼륨을 살리면 인공가슴처럼 보이고, 죽이면 가슴이 퍼져보이고, 와이어를 대면 가슴을 찌르고, 날개를 하면 살이 삐쳐 나오는데 어쩌면 좋겠느냐는 식이다.
각양각색의 시장조사 및 현장공부를 통해 얻어진 아이템은 시제품으로 만들어지고, 피팅모델 착용 등 사내 품평회를 거쳐 세상에 나온다. 기획한 제품의 유사제품이 시장에 깔릴 정도로 대박이 나면 MD가 느끼는 건 희열 이상이다.
광범위한 사후관리도 MD의 역할. 수선에 얽힌 에피소드도 많다. “개가 물어 갈기갈기 찢긴 팬티를 붙여주고”(홍 대리) “빨리 말리려고 가스레인지에 돌리다가 와이어가 터져 딱딱하게 굳은 브래지어를 보면 난감하고”(박 대리) “수십 년 된 여성 잠옷의 삭은 면을 때워주고”(김 과장) 등이다. 소비자의 잘못을 탓할 수도 있지만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사랑하는 단골 고객의 맘을 쉽게 외면할 수 없다. 오히려 상대가 남자라 불편사항을 속시원히 말 못하는 고객에게 미안할 뿐이다.
눈짐작만으로도 대충 여성의 속옷 사이즈를 맞추는 경지에 이른 그들이지만 아직 배가 고프다. 여성 속옷은 브래지어에 들어가는 소재만 20가지가 넘고, 세심한 수작업을 거쳐야 하는 기술과 정성의 결정체인지라 패션 편안함 트렌드 기능 안전 등을 두루 갖춰야 한다. 박 대리는 “자식 같고 동생 같은 제품이 반품돼 사라지면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서 신비로운 여성 속옷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유행을 선도하기 위해, 최고의 속옷을 선사하기 위해….” 세상의 체면따위는 잠시 버려둔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사진=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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