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꺼이 꺼이 울며 가더니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 이성복 ‘비’
비의 계절이다. 퉁명스런 하늘이 마른 얼굴을 치우지 않고 있지만 머잖아 먹빛 구름이 머리를 덮을 것이다. 하지가 지나고 원추리가 필 무렵, 이 강산 하늘은 옹기 화로 운두의 텅 빈 잿빛을 닮는다. 그리고 너부죽이 부푼 공기 속으로 옥빛 물줄기가 사선을 긋는다. 장마의 젖은 숨은 깊고 짙다.
또랑또랑 깝치던 일상의 부박함도 이 계절엔 물 먹은 모래처럼 가라앉는다. 누군가의 얼굴이 물기 어린 창에 떠올라 번진다.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여름비는 바닥에서 피어난다. 봄비처럼 찰방거리지도, 겨울비처럼 그악스레 땅을 후비지도 않는다. 데워진 땅이 가닥가닥 흙비린내를 풍기면 살갗보다 코가 먼저 비를 느낀다. 장마철에 나선 길은 그래서 땅내음에 젖는 여정이다.
벗은 복사뼈에 닿는 빗물의 감촉을 느끼며,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의 서로 다른 냄새에 몸을 맡긴다. 허랑한 발걸음에 긴 채비는 덧없다. 요란치 않은 바랑과 폭이 넉넉한 우산이면 족하다.
장마철 여행은 혼자가 좋다. 코끝을 내려보는 부처의 시선을 한 채, 빗줄기에 섞여 우산을 두드리는 상념에 귀를 열어 보자. 감춰뒀던 고독과 꺼내놓지 못했던 고백,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머물지 못했던 변명들, 함께 한 순간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툭툭 발길을 끊어 놓을 것이다. 너절해뵐 수 있는 청승도 이 계절엔 흠 되지 않는다. 천둥소리와 눅눅한 추억이 이 만행(漫行)의 벗이 돼 줄 것이다.
■ 영월 선암마을
래프팅으로 몸살을 앓는 동강과 달리 서강은 아직 노출이 덜한 곳이다. 선암마을은 주천강과 평창강이 몸을 섞어 서강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곳으로, 산마을 처자의 몸세처럼 짓수굿한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원앙과 수달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하고 맑다. 물안개에 잠긴 선암마을에서는 밭은 숨조차 촉촉히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평소 넓은 모래톱을 드러내는 곳이지만, 장마철에는 꽤 다급한 물살이 산을 휘감고 돈다. 비를 받으며 천천히 거닐면 남종화의 풍경 속에 선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신을 벗어 놓고 물 먹은 흙의 부드러운 속살을 밟아보는 것도 이 계절에만 가능한 경험이다. 서강을 따라 물길을 좇으면, 단종의 서러움을 품은 장릉의 아름다움도 만날 수 있다.
■ 조계산 불일암
어디든 마냥 귀의하고픈 절실함이 있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송광사의 말사이지만, 이곳의 소박한 호젓함 앞에 그런 격은 거추장스럽다. 이 암자엔 일주문도 불이문도 없다.
퇴비를 굳힌 듯 검은빛을 띠는 흙계단과 서걱대는 댓바람이 법계와 색계를 통로처럼 이어준다. 작은 선방과 부엌, 화장실 하나가 전부인 검박한 입정(入定)의 세간살이 앞에, 머릿속에 고집스레 담고 온 상념이 부끄러워진다.
내면이 탁한 여행자에게, 이곳은 오래 있기가 죄스러운 곳이다. 허니 온 길을 되짚어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한다. 되돌아 내려가는 길에 우산을 젖히고 자꾸 되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빗줄기에 가려 멀어지는 불일암의 모습에 추잡한 아집도 함께 묻히기를 바라며. 고독이 사무량심으로 화할 수 있는 곳이 속세에 있다면 아마 여기가 아닐까. 법정 스님이 지은 암자로 소박한 그의 품성이 배어있다.
■ 종로 부암동길
‘호젓함’마저 기성품으로 포장해 파는 서울에서 그나마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후각 예민한 자본에 의해 이 거리도 허겁지겁 팬시상품으로 꾸며지고 있지만, 아직 한적하고 예스러운 서울의 풍경이 많이 남아 있다. 카페들이 새로 들어선 창성문 부근보다는 부암동사무소를 지나 인왕산길로 이어지는 주택가가 좋다.
양팔을 뻗으면 손바닥에 두 벽이 닿는 좁은 골목길, 사자머리 모양의 손잡이가 아직 달려있는 철제 대문, 가파른 언덕 위의 교회가 아직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남아 있다. 장대비가 내리면 시멘트로 덮인 골목 위로 빠른 물살의 도랑이 생겨난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손수 뽑은 커피를 파는 가게들도 구석구석 숨어 있다. 비 긋는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진한 커피 한 잔의 고독이 간절해지는 곳.
■ 전주향교와 전동성당
퇴락한 도시의 풍경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먹먹한 향수를 갖고 돌아가게 만든다. 전주라는 도시가 그렇다. 하지만 새로 조성된 한옥마을은 버거운 상술이 가득하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과 동행하고픈 여행자라면, 그 끝에 자리한 전주향교가 적당한 곳이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검은 나무기둥에서 풍겨오는 수백년 묵은 향이 마당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감싸고 돌아 코끝을 건드린다.
전동성당은 번잡한 한옥마을의 초입에 있지만, 경내?고요한 공기는 깊은곳에 숨어 있는 수도원 못지않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백년 세월을 지켜 본 돌계단이 다시 물이 든 듯 윤기를 되찾는다. 옛 왕조의 박해와 도시의 성쇠를 겪어낸 육중한 석조건물에 낙숫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서 있으면, 바로크 성가곡이 귓전에서 연주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 김포 초지진
활어회나 조개구이를 먹으러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초지진. 이곳은 비바람이 부는 날에야 외적을 막아 둔진(屯陣)하던 본래의 면목을 되찾는다. 황산도를 향해 치닫는 빠른 물살은 격한 파도를 토해내고, 포구에 서서 꺾이는 물결을 굽어보는 여행자의 뺨에도 거친 빗줄기가 침범한다. 덩그라니 전시된 대포 한 문이 빗속에서 홀로 처량하다.
대명포구에 자리잡은 어지러운 장삿집의 간판들도 비바람 속에서는 그 천박함이 면책된다. 길고 긴 해안을 따라 걸으며, 혹 좌판을 걷지 않은 아낙이 있다면 소주 한 잔도 좋다. 지난했던 역사와 현란한 상술, 바닥없이 침잠하는 여행자의 내면이 비 내리는 김포 앞바다에서 얼근한 취기에 젖는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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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드득' 빗줄기에 빈대떡 생각나 '후닥닥'
괜히 울적해지는 마음, 빗소리에 정처없이 거리를 걷고 싶다면 오늘만큼은 재래시장 먹자골목의 ‘빈대떡 신사’가 돼보는 건 어떨까. 구수한 음식 냄새와 비좁은 시장통을 ‘둥둥’ 울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빗소리가 묻혀버리는 곳, 서울 종로4가 광장시장이다.
이곳은 2005년 청계천 복원 후 조촐한 재래시장에서 도심 나들이 손님들이 북적대는 최고의 명소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맷돌로 직접 갈아 만든 녹두빈대떡처럼 두툼하고 넉넉한 인심이 살아있는 곳이다.
“음식 냄새가 재래시장 인심만큼 정겹잖아요. 가격도 싸고, 고기 대신 숙주나 파 같은 야채만 넣어서 건강에도 좋고. 거칠게 갈아서 알갱이가 씹히는 녹두 맛이 최고!” - 인터넷 요리사이트 www.rimi.kr 운영자 조성림(27)씨.
흙탕물 튀기는 빗속을 거니는 게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마루에 배를 깔고 빗소리를 들어보자. 후두둑 떨어지던 빗줄기가 어느새 굵어졌는지 심술난 아이처럼 ‘툭툭’ 지붕을 친다. 장단 맞추듯 떨어지는 빗소리. 어라, 이거 기름 지지는 소리 아냐!
“비가 오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뭔가를 꼭 기름에 지지는 것 같아요. 전을 부칠 땐 반대로 밖에 비가 오나 창문을 열어보게 되고요. 지글지글 쏴아아~. 이런 게 청각의 미각화일까요. 하하.” - 여성포털사이트 이지데이(www.ezday.co.kr) 선정 ‘요리 마니아’ 이재건(27)씨.
■ '아빠표' 라면파전·간장버터 떡강정 "굿"
여성 요리 마니아들의 틈새에서 ‘청일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재건씨는 장마철에 집에서 간편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퓨전 요리 두 가지를 추천한다. 라면 파전과 간장버터 떡강정!
라면 파전은 전통 파전에 라면과 스프를 넣어 매콤하고 담백한 맛을 살린다. 쫄깃쫄깃한 라면 씹는 맛이 일품이다. 간장버터 떡강정은 흰 쌀떡을 간장과 버터를 버무린 소스에 묻혀먹는 이색 떡볶이. 와인 한 잔에 곁들이면 운치가 있고, 달콤한 맛이 아이들의 입맛에도 딱이다. 요리법도 간편해서, 휴일에 아빠의 솜씨를 뽐낼 수 있는 기회다.
▲ 라면 파전
준비물 : 라면 한 봉지, 계란 2개, 밀가루 3큰술, 청양고추 3개, 잔파 1/2줌, 후추, 청주 1큰술.
1. 라면 한 봉지를 꺼내 면만 잘 삶는다. 찬물에 헹군 후 물기를 빼 면의 쫄깃함을 살린다.
2. 계란 2개와 후추, 청주를 넣은 후 골고루 젓는다.
3. 계란에 라면과 스프, 청양고추, 잔파, 밀가루를 넣고 조물조물 섞어 반죽을 만든다.
4.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라면 반죽을 넓게 펴서 약한 불로 노릇노릇 바삭하게 굽는다.
▲ 간장버터 떡강정
준비물 : 떡 한 줌, 식용유 3큰술, 버터 2큰술, 간장 2큰술, 설탕 3큰술.
1. 쌀떡을 식용유에 노릇하게 튀기듯 굽는다.
2. 식용유를 닦아낸 후 버터를 넣어 떡들을 굴려준다.
3. 약한 불에 설탕과 간장을 넣은 후 캬라멜처럼 쫀득쫀득해질 때까지 젓는다.
이현정기자 agada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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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雨中·醉中 "통하네"
비가 오는 날이면 잡혀 있던 술 약속마저 취소하고 일찍 집에 들어가던 선배가 있다. 일단 옷이 젖어 품위있게(?) 술을 마시기 어렵고, 자칫 사고를 당하기 쉬워서라고 이유를 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르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한국인의 위장은 유독 비를 맞으면 혈중 알코올 농도가 내려가기라도 하듯, 술을 원하니 말이다.
주류업 홍보를 맡고 있는 바움컴의 홍영은 팀장은 “비가 오는 날 어울리는 술자리는 아무래도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와 빗소리를 함께 들으며 동동주를 마실 수 있는 피맛골의 허름한 주점 같은 곳이 아닐까요. 이런 곳이 불편하다면 통유리로 둘러싸인 와인바가 제격일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장맛비는 가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혹은 폭우로 변하는 만큼 천재지변을 제외하면 가장 급격한 날씨 변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마철이면 감정마저 급격하게 변하고 그 틈을 비집고 예전의 경험, 기억,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왜 비와 술을 연관시킬까라는 질문에 두산주류의 조판기 차장이 내놓은 답이다. “더운 여름에 비를 맞으면 체온이 내려가고 체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몸은 자연적으로 고칼로리 음식을 찾게 되죠. 배를 채우면서 침잠한 감정을 다스리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게 바로 술자리잖아요.”
비와 딱 맞는 술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싶다’느낄 때는 사실 술보다 그 술과 잘 맞는 안주가 더 먹고 싶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즉 비 오는 날 막걸리가 먹고 싶은 건 파전을 원해서이고, 청주가 마시고 싶은 건 따뜻한 국물이 당겨서라는 말이다. 뜻밖에 소주는 비 오는 날 인기있는 주종이 못 된다. 주로 함께 먹는 삼겹살 등 안주 냄새가 축축한 날엔 더 진하게 남기 때문이다.
우울한 기분을 달래고 싶을 때는 조금은 독한 칵테일도 괜찮다. 위스키업체 디아지오 코리아의 도움말로 장마철에 즐길 만한 칵테일 만드는 법 두 가지만 소개한다.
우선 마티니 글라스를 준비한다. 스카치 위스키 45㎖에 스위트 버무스 15㎖를 섞은 후 저어준다. 이름은 ‘블랙 맨해튼’. 술기운을 느끼며 취하고 싶은 비 내리는 밤,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즐기기에 좋다.
데킬라 50㎖와 커피콩 2개, 시나몬 스틱 1개, 오렌지 껍질 1개, 아가베 시럽 5㎖로 만들 수 있는 ‘멕시칸 블레이저’도 후끈하게 장마의 우울함을 날려준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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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그 음악 '촉촉한 유혹'
비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 공기 중에 떠올라 있던 먼지가 비로 가라앉아 씻겨 내려가듯, 정신에 혼탁하게 자리했던 잡생각이 빗소리에 말끔히 걷히기 때문이다. 비와 어울리는 음악과 영화를 대중문화평론가 강태규, 차우진씨의 도움말로 골라봤다.
영화
● 트루 로맨스
- 청춘의 로맨스와 폭력이 결합해 음울하지만 쾌활한, 이상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 어느 멋진 날
- 조지 클루니와 미셸 파이퍼의 매력이 빛나는 작품. 비 오는 날의 가라앉은 기분과 영화의 따뜻한 로맨스가 섞이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진다.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빗속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이 벌이는 격투 장면으로도 유명하지만 사실은 영화 내내 비가 오는 것 같은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 블레이드러너
- 비와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미래 사회에 대한 암울한 풍경이 마치 시를 읽듯 펼쳐진다.
● 사랑은 비를 타고
- 비, 하면 생각나는 가장 유명한 고전 영화. 진 켈리가 빗 속에서 ‘Singing in the rain’을 따라 부르는 모습은 한때 빗 속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애정 고백으로 꼽히기도 했다.
음악
● 조용필 / 추억 속의 재회
- 조용필 12집에 담긴 명곡. 장맛비가 내릴 동안에는 누구나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조용필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아련한 추억의 느낌을 살려냈다.
● 박학기 / 내 소중한 사람에게
- 좋은 노래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좋은 노래가 담고 있는 감성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1989년에 발표된 박학기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지금은 사라져 가는, 수채화처럼 영롱한 감수성을 담고 있다.
● 에브리싱 벗 더 걸 / My head is my only house unless it rains
- 비 오는 날 집에 앉아 평온한 하루를 보내는 그 느낌을 그대로 음악으로 옮겨 놓는다면 바로 이런 곡이 아닐까. 노래를 듣다 보면 창 밖으로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곡.
● 태양 / 나만 바라봐
- 그룹 빅뱅의 멤버 태양의 솔로곡이다. 화려한 사운드를 자랑하면서도 멜로디는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드는 감성적인 호소력이 있다. 잔잔하게 내리는 비처럼 정중동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 류이치 사카모토 / 레인
- 영화 ‘마지막 황제’에도 담겼던 곡. 푹푹 찌는 한여름 더위 뒤에 찾아온 소나기를 맞아본 적이 있는가. 치열한 긴장을 단번에 푸는 이 곡의 후반부가 바로 그런 느낌을 준다.
강명석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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