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그녀는 칼을 들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내리쳤다. 손가락이 절단되고 사방으로 피가 튀자 학생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쳤다.”(29쪽) 허경숙은 임신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동지들과 함께, 기독교 계열의 여성 단체밖에 없던 조선에서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아직도 여필종부의 논리가 기세 등등하던 일제 시대, 봉건적 가부장제와 반(半)자본주의적 관습을 뚫고 페미니즘의 맹아는 그렇게 싹트고 있었다.
“지난해 6월부터 벌여온 작업의 결과를 이제 내놓습니다. 노동 운동쪽에 관심을 두다, 미시사 쪽으로 관심을 돌려 얻은 첫 성과입니다.” 첫 책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 사건> 을 세상에 내놓은 역사 연구가 이철(37)씨는 첫 책답지 않은 중량감에도 불구, 이제 막 길을 떴다는 표정이다(다산초당). 경성을>
긴 여정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관심이 영화에서 학문 분야까지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책은 당대의 문헌학적 기록을 천착, 보다 사실적인 접근으로 새 지평을 열어 보인다. “당시 논쟁 기록 등 실제 자료에 달라붙어 작업한 결과죠.”
역사의 응달까지 찬찬히 짚어 가는 그의 길지 않은 삶에는 많은 주름이 보인다. 대학을 중퇴, 정규의 삶을 거부했던 그는 고향인 강원 양양군에서 공무원을 하다 노조를 결성, 서울로 올라온 97년에는 공무원 노조를 준비하다 2002년 직장협의회로 합법화하는 데 한몫을 담당하게 된다.
바쁜 활동의 와중에 그는 대학 도서관 등을 드나들며 자신의 공부를 이어 나갔다. “노동 운동 역사 자료실에서 1880~90년대의 노동 운동 자료를 정리해 백서로 만드는 작업을 하다 보니, 여성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먹고 살고 연애하는, 인간의 삶 자체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박헌영이 50대에 딸 같은 20대 여성과 결혼한 사건이나 당시 심심찮게 벌어졌던 비련의 한강 투신 사건 등을 인간적으로 해석해 보자는 것이었다.
구한말, 해방 공간은 그에게 상상력의 보고다. 테로(독립 운동 테러), 에로(카페의 연애담), 그로(그로테스크) 등 당시도 ‘3로의 시대’라며 창작 욕구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근대의 풍속사를 천착, 학문적 성과를 내고 싶어요. 20세기초를 재현하는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으로부터 요청이 온다면 적극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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