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한의 핵신고서 제출에 맞춰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하는 것은 북미관계가 한단계 격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국제금융기관의 지원 등 실질적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의미가 크지만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그 자체가 주는 정치ㆍ외교적 상징성 또한 매우 크다. ‘KAL기 폭파사건’ 발생 2개월 후인 1988년 1월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북한으로서는 20년 만에 족쇄가 풀리는 것이다.
미국이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고 그에 맞춰 북한에 대한 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제외하면 북미관계는 일단 장관급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진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북한과 마주한 미측 최고위 인사였으나 앞으로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직접 나서 북한과 실질적 양자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북핵문제 해결 2단계가 마무리될 때쯤 북핵6자회담 참가국 외무장관 회담을 여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태도를 돌변하지 않고 적절한 협조를 계속한다면 양국 외무장관의 상대국 수도 방문도 실현 가능한 이벤트가 될 수 있다. 내년 1월 임기가 끝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내세울 수 있는 외교적 업적의 하나로 임기 내에 평양에 연락사무소 설치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만으로 북미관계가 탄탄대로에 들어섰다고 보는 것은 시기상조다. 라이스 장관이 최근 언급했듯, 부시 대통령의 미 의회 통보 이후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가 실제 효력을 갖는 45일 이내에 북핵 신고 검증에서 문제점이 발견되거나 북한의 또 다른 약속위반이 드러날 경우, 미국은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절차를 중단할 수 있다. 신고서 내용 자체가 역풍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고 내용이 미국 강경 보수세력의 기대에 현저히 미치지 못할 경우, 이들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추가협상을 봉쇄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건 없이 만날 용의가 있다던 민주당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최근 핵무기에 대한 신고가 이뤄지지 않으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부시 행정부의 운신의 폭을 좁게 하고 있다.
향후 북핵 신고의 검증과 북핵 폐기 3단계 과정을 상정해 보면 북핵 문제의 앞날은 도처에서 지뢰밭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다. 북핵 신고 검증에 1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북한이 생산한 무기급 플루토늄의 양을 확정하는 데에도 북미간에 지난한 줄다리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핵무기 관련 내용이 이번 신고서에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핵무기의 신고 및 검증에 대해선 어떠한 낙관적 전망도 하기 어렵다. 게다가 북한이 핵무기 협상에 들어가기도 전에, 영변 핵시설 불능화의 대가로 경수로 제공을 요구할 것이 거의 확실시돼 북핵 문제 해결 및 북미관계 진전은 언제든 중단되거나 후퇴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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