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부쩍 권위의 몰락 내지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빈번히 들려오고 있다. 원래 권위라 함은 ‘위임받은 권력’을 의미한다. 여기서 권력을 위임한다 함은 권력자 개인에게 전권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일정한 힘을 실어주는 것을 뜻한다고 봄이 옳다.
한데 요즘 젊은이들은 권위를 ‘오소리’(?)라 칭하곤 한다. 영어 authority(오소리티)의 발음을 변형한 것에서 젊은 이다운 재치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권위를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읽힘 또한 부인하기 어려울 듯 하다.
교수를 당혹케 하는 대학생들
일례로 최근의 강의실 풍경 속에서 교수라는 직위에 부여된 권위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강의 도중 친구가 보낸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받곤 슬그머니 나가는 녀석들이 부지기수요, 수업 중 교수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옆자리 친구와 잡담하는 학생들, 보기 민망할 정도의 애정 표현을 일삼는 캠퍼스 커플들, 심지어 B-는 재수강이 안 되니 성적을 C+로 내려 달라고 조르는 모범생(?)들을 대하노라면, 교수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가족이라 하여 풍경이 그리 다르지 않음은 물론이다. ‘밥상머리 교육’으로 대변되는 아버지의 훈육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요, 초・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 혹은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인물을 꼽으라는 설문에, 대다수 학생들이 유명 연예인을 지목한 덕분에 아버지는 5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아버지가 몇이나 되겠는지.
일전에 만났던 대기업 임원 왈, 예전엔 상사가 “오늘 회식이 있다” 하면 이미 했던 약속들 취소하고 양복 윗저고리에 팔 끼우며 부지런히 따라나섰건만, 요즘은 상사 앞에서 고개 빳빳이 세우곤 “저는 오늘 선약(先約)이 있는데요” 한다는 것이요, 자신의 몸값 올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상사를 위한 헌신이나 조직을 위한 희생은 철저히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는 현실이 당혹스럽기만 하다는 고백이었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함인가, 이제 권위도 지위에 자연스레 부과되기보다는 개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권위의 인정 여부가 결정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개인권위’가 ‘지위권위’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직장 상사니까, 아버지이기 때문에, 교수라는 이유로 무조건 존경을 표하거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부하 직원을 얼마나 세심히 챙기는 상사인지, 자식 뒷바라지를 얼마나 잘 하는 아버지인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강의를 얼마나 잘 하는 교수인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오죽하면 가장 인기 있는 아버지상은 ‘날마다 산타클로스형’이요, 가장 이상적인 상사는 ‘자신의 결혼기념일을 기억해주는 감성적 보스’라 하지 않던가.
대통령도 스스로 권위 세워야
생각보다는 느낌이 앞서고, 기다림보다는 즉각성에 익숙하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신세대에겐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이 보다 자연스레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들 앞에 대통령의 권위인들 예외일 수 있겠는가. 개인권위에 충실한 신세대가 “2MB OUT”을 외치는 동안, 이들은 대통령이라는 지위 앞에 무조건 고개 숙이기보다, 일자리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치솟는 물가를 잡아 주며 선진국의 간절한 꿈을 실현시켜 줄 유능한 대통령을 기대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신세대식 개인권위의 손을 들어주자는 의미는 아니다. 차제에 국민이 위임한 권력이나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인정된 권위를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치는 작업을 병행하면서, 권위를 부여 받은 개개인 또한 지나간 시절의 영화를 아쉬워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발목 잡히기보단 스스로의 권위를 고양시킬 수 있도록 역량을 최대한 강화함이 진정 실용적 대안이리라는 생각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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