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ㆍ북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해방 직후 정치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김일성이 해방 3년 전부터 소련군에 의해 체계적인 정치ㆍ군사지도자 교육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국후(62) 전 조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는 전 평양주둔 소련군정 고위 고위정치장교와 구 소련 망명 북한 군ㆍ정 고위인사와의 인터뷰, 소련 국방성, 소련 공산당중앙위원회의 비밀문서 등을 분석해 <비록(秘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발행)을 냈다. 비록(秘錄)->
저자는 김일성, 오진우 등이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가 소련극동군 산하 조ㆍ중 혼성 특수부대 제 88정찰여단 산하로 흡수됐던 1942년 당시 이 부대의 성격을 설명하는 문건을 공개하며, 이런 주장을 편다.
당시 이 부대 여단장이었던 중국인 저우바오중 중좌가 그해 8월 바실레프스키 소련극동군 총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88정찰여단은 42년 6월 스탈린의 직접지시에 따라 창설됐으며 그 목적은 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빨치산 부대와 같은 군사ㆍ정치 전문가 양성이다.
저자는 “소련은 42년부터 극동지역 한반도에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동유럽에서처럼 소련공산당의 위성국가를 세우기 위해 군사ㆍ정치지도자를 양성했다”고 주장한다.
이때부터 김일성이 소련군 장교복장으로 원산으로 들어오는 45년 9월까지는 스탈린이 향후 북한에 세워질 위성국가의 정치지도자로 김일성을 훈련시키는 기간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해방직후 국내와 해외를 대표하는 공산주의리더인 박헌영과 김일성이라는 공산주의 리더 가운데 누구를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할까에 대한 소련내부의 미묘한 분위기도 흥미롭다.
소련 군사장교인 코바렌코의 증언에 따르면, 박헌영이 46년 5월 KGB 지국을 통해 스탈린에게 공산당은 남한에서 평화적으로 활동해 인민들을 끌여들여야 한다며 김일성의 무장혁명노선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자 KGB는 김일성에게 노선을 시정하게끔 경고했다는 것이다.
군부와는 달리 정보기관 쪽에서는 박헌영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싫어하는 코민테른 활동전력이 없으며, 빨치산 운동을 해 다른 종파에 관여하지 않았고, 소련에 충성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김일성을 선택했다고 저자는 결론내린다.
한편 책은 46년 3월 박헌영이 미국의 U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임시정부가 창설될 때 김일성을 지지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북조선의 여러 당에서 김일성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면 우리 당(남로당)은 인민과 함께 지지한다”고 언급한 사실, 45년 10월 소련군 환영대회에서 김일성이 스탈린 만세와 함께 박헌영 만세도 외쳤다는 박병률 전 북한 강동정치학원장의 증언 등을 공개하며 김일성과 박헌영이 일관되게 정적(政敵)관계를 유지했다는 기존통념을 반박한다.
이에 대해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42년이면 스탈린이 김일성을 알지도 못하는 시기였으며, 스탈린이 직접 지령을 내린 문건 등이 나와야 진상이 파헤쳐 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광서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88정찰 여단은 일소중립조약(41년) 체결 직후 일본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소련이 극동의 공산주의 게릴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성격이 강한 부대”라며 “스탈린은 해방직후 유럽에 강력한 친소위성국가를 세우려 했던 반면, 한반도에는 최소한 소련에 적대적이지 않은 국가가 들어서면 된다는 전제로 정책을 추진한 한만큼 일찍부터 위성국가의 지도자를 교육시켰다는 것은 무리한 추측”이라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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