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의 6월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먼지 바람에 하루종일 시뿌옇다. 두바이 간선대로인 셰이크자예드로(路) 주변에서 공사가 한창인 고층 빌딩들은 희뿌연 먼지에 신기루처럼 보인다.
강남구와 송파구를 합쳐놓은 조그만 두바이에서 건설중인 건물 중 50층 이상 고층만 50여개. 전세계 고층 크레인의 28%가 UAE에 운집해 있다는 현지인의 주장이 허풍으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두바이는 높은 빌딩만큼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단기간에 ‘중동의 쇼핑센터’로 뒤바꿔놓은 두바이 지도자들의 리더십, 쏟아져 들어오는 천문학적 오일달러 등은 희망적이다. 반면 시장의 자율성을 배제한 국가주도의 성장모델은 분명히 비효율적이다.
지도자가 관심을 보이는 소수의 사업 이외에는 관료주의가 팽배하다. 현지의 한 한국인 기업인은 회사 설립에 2년 이상 걸렸다고 말했다. 진출입에 아무 제한이 없고,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은 광고에 나오는 문구일 뿐이다.
해변에 늘어선 고급 빌라들의 공실률이 50%를 넘을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고급 주택 건설을 위한 인공섬 건설은 여전히 강행되고 있다. 지도자의 명령 때문이다.
두바이에서 10여년간 사업을 해 온 한 외국인 사업가는 “두바이 정부 관료들은 현재의 경제붐을 일단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계속 커지는 ‘눈덩이’로 생각하고 있다”며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전거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국부펀드로 상징되는 중동의 네오 내셔널리즘은 오일달러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했다. 1970년대 중동 산유국들은 주체할 수 없는 오일달러를 사치품 같은 소비재 구매나 과시성 투자에 쏟아부으며 흥청망청했다. 이후 유가가 하향 안정되자 산유국들은 오랫동안 서방의 대형 석유회사에 끌려 다녀야 했다.
30여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오일 특수’가 과거처럼 빛을 바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중동의 노력은 반 서방 연대의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90년대 이후 본격화한 서구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반발이다. 세계화에 저항하는 ‘이슬람 경제블럭’을 구축하려는 중동판 네오 내셔널리즘이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중동 자본과 인력에 대한 서방국가의 출입장벽이 높아지면서 중동 블록 내 교역도 급성장하고 있다. 사우디 부유층이 휴가를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내는 대신 두바이 등 중동 내 휴양지를 찾는 식이다.
지난해 중동 지역의 관광객 증가율은 전년에 비해 13% 가까이 늘었다. 중동 오일달러가 중동 경제블록 내에 투자되는 선순환 고리가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바이는 넘치는 오일달러의 대안 투자처로 각광을 받으며,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01년 200억달러에 불과했던 걸프 산유국들의 금융자산 규모는 2010년에는 1,390억 달러로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ㆍUAE 등 걸프지역 산유국들이 석유수출로 벌어들인 오일달러는 4,763억달러(약 480조원). 2003년 1,721억달러에서 불과 4년 만에 2.8배가 늘어났다. 유가가 급등한 덕이다.
걸프국가들의 확인된 석유매장량을 돈으로 환산하면 65조달러(약 6,500조원). 전세계 금융시장 주식ㆍ채권 총액보다도 많다. 전 세계의 모든 부를 빨아들이는 ‘자본의 블랙홀’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다.
자본 이동의 문턱이 낮아지는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산유국이 산업다변화에 성공할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게 정설이다. 석유수출로 늘어나는 무역흑자가 산유국의 화폐가치를 치솟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국내산업의 가격경쟁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국내 생산을 육성하는 것보다 수입품을 쓰는 게 더 경제적이다.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석유수출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른바 ‘석유의 저주’이다.
이제 산유국들은 국가주도로 이 같은 저주의 사슬을 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6년 기준 걸프 산유국들의 부문별 투자를 보면 석유 및 천연가스에 대한 투자는 16%에 불과했다. 반면 건설투자는 59%, 석유화학에는 10%를 투자해 자립적 산업기반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을 활용한 두바이식 산업다각화 전략이 사우디 오만 등에서 속속 채용되고 있다. 중동 지역 최대 영자지 걸프뉴스의 사미르 살라마 아부다비 지국 부편집인은 “두바이의 성공은 상인기질에서 비롯된 외부 문화에 대한 유연함과 실용정신이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주도의 산업 다변화’와 ‘중동 내 독자 경제블록 구축’으로 요약할 수 있는 중동 산유국들의 네오 내셔널리즘이 세계화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세계화의 시대가 끝나고 국가가 다시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도했다. “9ㆍ11 이후 국가안보에 대한 필요가 높아진 데다, 원자재값 상승으로 부유해진 신흥 자원부국들이 천연자원을 무기 삼아 선진국을 위협하는 등 개별국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효율성을 외면한 내셔널리즘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비판론도 만만찮다. <세계는 평평하다> 라는 저서에서 세계화를 강조했던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국가의 경제적 영향력 강화는 장기적이라기보다는 세계화에 대한 일시작 반작용인 에피소드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기술의 진보와 시장의 효율성을 갖춘 개인들의 힘은 계속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계는>
80년대 번창했던 바레인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외국기업이 떠나버려 순식간에 유령도시로 변해버린 것처럼,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이 시장의 효율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중동의 네오 내셔널리즘도 ‘사막의 신기루’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이다.
■ 와힙 아메드 알아타르 아부다비 국립은행 대외투자 협력담당 인터뷰
"아부다비는 석유수입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국부펀드를 조성한 것입니다. 국가주도의 해외투자 기금이지만 수익을 극대화한다는 점 외에 다른 정치적 고려는 없습니다."
전통 아랍의상 차림의 와힙 아메드 알아타르 아부다비 국립은행 대외투자 협력부문 책임자는 기자에게 아라비아 전통 커피를 권하면서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지만, 어조는 단호했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식 억양을 지닌 그는 국부펀드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의식한 듯 투자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차단막을 쳤다.
한 외국기업이 다른 나라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아부다비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부펀드의 목적이자 생존기반일 뿐 중동 자금을 정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서구의 정치적 편향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구성하는 7개 토후국 중 맏형격인 아부다비는 풍족한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3,000달러(2006년 기준)에 달한다.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다음의 세계 3위 부국이다. 하지만 석유수출 의존도가 절대적이어서 이웃 토후국인 두바이의 '석유 없는 성공'을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와힙의 궁극적 임무도 '석유없는 아부다비'의 미래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와힙 책임자는 "산업 다변화"라는 말을 수 없이 반복했다. "무역 제조업 금융 관광 대체에너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1조달러가 넘는 투자를 하고 있다"는 그는 '이산화탄소ㆍ폐기물 제로'의 미래형 무공해 계획도시인 '마스다르(Masdar)'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아랍 박물관 유치를 최대 성과로 꼽았다.
마스다르는 내년 1단계가 완공된다. 아부다비가 국부펀드에 얼마나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와힙은 "최첨단 인프라, 기업의 수익에 대한 과세 면제, 적절한 임금 수준 등이 아부다비의 강점"이라며 "세계의 대형 연금펀드들의 투자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며 한국자본의 참여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국제석유투자공사(IPIC)가 한국의 현대오일뱅크에서 지분 70%를 투자하는 등 아부다비의 투자망은 한국에도 뻗쳐있다.
두바이=정영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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