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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8> 궂기다-삶과 사랑의 궂은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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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8> 궂기다-삶과 사랑의 궂은 그늘

입력
2008.06.2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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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더 타오르는… 사랑이란 죽음에 맞서는 몸짓

한겨레신문의 부음 난 이름이 '궂긴 소식'으로 바뀌기 전까지, 내 한국어 어휘 목록에 '궂기다'라는 말은 없었다. 그 신문에서 '궂긴 소식'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땐, 혹시 오자가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래도 이 신문은 내게 낯선 이 단어를 매일 썼고, 나는 할 수 없이 국어사전을 들추게 됐다. 사전은 '궂기다'를 "1. 일에 헤살이 들어 잘 되지 않다. 2. 상사(喪事)가 나다. 돌아가다."라고 풀이해 놓고 있었다.

'궂긴 소식'의 '궂긴'은 두 번째 뜻의 '궂기다'를 과거관형형으로 고쳐놓은 것이다.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좋은 소식, 궂은 소식, 나쁜 소식, 기쁜 소식, 슬픈 소식처럼 소식을 일부 성상형용사나 심리형용사의 관형형으로 수식하는 건 자연스럽지만, 궂긴 소식처럼 동사의 (과거) 관형형으로 수식해도 되는가?

안 될 것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자연스럽지도 않다. 이를테면 '상사가 난 소식'이나 '돌아간 소식'보다는 '상사가 났다는 소식'이나 '돌아갔다는 소식'처럼 인용법을 써 수식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일부 형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니, '아픈 소식'은 '아프다는 소식'을 서툴게 표현한 것이거나, 소식의 성질 자체가 아프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궂긴 소식'을 '궂겼다는 소식'으로 바꾼다면 정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사실 '궂긴 소식'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고 대뜸 연상된 말이, 매우 불경스럽게도, '웃긴 소식'이었다.

'궂긴 소식'이라는 표현에 대한 내 소감이 혹시라도,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토박이말로 다듬으려는 건강한 노력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마땅히 용서를 구해야겠다. 조롱의 뜻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그 말에 대한 소감이었을 뿐이다. '궂긴 소식'이라는 말을 몇 해째 접하다 보니, 나도 이제 어느 정도 그 말에 적응이 되었다. 아직도 '부음'이나 '부고'라는 한자어가 더 쉽고 친숙하긴 하지만.

'죽다'의 유의어 '궂기다', '궂다'의 파생어

'죽다'의 유의어인 '궂기다'가 형용사 궂다(凶)와 관련돼 있음은 한눈에 또렷하다. 요즘 사람들에게도 그렇듯, 옛 사람들에게도 죽음은 가장 궂은일에 속했을 것이다. 현대어로도 '궂은일'은 '시체를 치우거나 장례를 치르는 일'을 에둘러 표현하는 데 쓰인다.

궂은비, 궂은살(군더더기살), 궂은고기(질병 따위로 죽은 짐승의 고기), 궂은쌀(깨끗이 쓿지 않은 쌀), 궂은 날씨 같은 표현에서 보듯, '궂다'는 뭔가 좋지 않고 언짢고 꺼림칙하다는 뜻이다. 그런 것 가운데 죽음 이상 가는 것이 있겠는가? '궂기다'와 마찬가지로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긴 하지만, 사전엔 '궂히다'라는 말도 올라 있다.

'죽게 하다, 일을 그르치게 하다'의 뜻이라 한다. '구정물(汚水)'의 앞부분이나 '해코지'의 뒷부분은 '궂다'의 어간과 한 뿌리일 가능성이 높다.

죽음은 얼마나 궂은일인가? 프랑스 역사학자 필리프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 (1985)이라는 유저의 3장에서 죽음의 궂음(이 아니라면 정화작용?)을 일깨우는 시들을 여러 편 인용하며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대목은 이렇다.

"네송의 시도 마찬가지다. '네가 세상을 떠날 때/ 네가 죽는 바로 그 날부터/ 너의 더러운 육신은/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리니....' 한낱 '썩은 고기', 혹은 '똥자루'에 불과한 인간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너를 땅 속에 파묻을 것이고,/ 커다란 돌덩이로 너를 덮어버릴 것이다./ 네 모습이 앞으로 영원히 보이지 않도록.' (......) 그렇다면 그(육신--인용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단 말인가! (.......) '더러움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점액, 타액, 온갖 잡스런 부패물들,/ 썩어 악취를 풍기는 배설물들./ 이 자연의 산물들을 잘 보시라....../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자가/ 악취 나는 물질과 구역질나는 것들을/ 계속해서 몸밖으로 배출하고 있음을.' 여기서 장켈레비치가 말한 '생명내적인 죽음(mort intravitale)'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죽음을 생명의 깊숙한 곳'에서 찾은 것이다."(고선일 옮김)

'공무도하가' '러브스토리'… 죽음은 사랑의 장벽

'출생은 죽음의 시작'(Birth is the beginning of death)하는 상투적 서양 속담이 말하듯, 죽음의 씨앗은 생명체 안에 있다. 그리고 사랑의 '자연적' 목적 하나가 생식이라면, 사랑은 개체의 죽음을 종적 생존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죽음은 사랑의 가장 큰 적이다. 고전시(<공무도하가> 의 백수광부)든 현대 대중소설( <러브스토리> 의 제니퍼 카빌레리)이든, 사랑 이야기는 흔히 한쪽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서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주인공도 있다.

프랑스어에서는, 우연히, 죽음(라모르: la mort)과 사랑(라무르: l'amour)의 음상이 비슷하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죽기 직전에 쓴 <이게 다예요> (C'est tout: 1995)라는 책의 앞부분에서, "예전에도 지금도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건 사랑이지. 죽음과 사랑."이라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너'는 뒤라스의 젊은 연인 얀 앙드레아를 가리킨다.

이 책의 한국어 역자(쑥스럽게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자다)는 책 뒤의 해설에다 이렇게 썼다. "작가가 표제에서도 암시하고 있는 그대로 아마 뒤라스의 마지막 텍스트가 될 <이게 다예요> 는 작가의 마지막 연인 얀 앙드레아를 향해 작가가 지피고 있는 마지막 사랑의 장작들로 그득 차 있다.

그 사랑은 때때로 여든한 살이라는 작가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뜨거운 사랑이다. 그것은 불꽃의 사랑이다. 그 사랑의 불꽃들은 이 책에 넘쳐나는 하얀 여백들을 검게 그을린다. 그렇다, <이게 다예요> 는 단순히 죽음의 서(書)가 아니라 사랑과 죽음의 서(書)다. 또는 그저 사랑의 서(書)다.

노년의 뒤라스, 마지막 사랑의 불꽃 지펴

이 책의 페이지마다 번져 있는 그 사랑의 기운은 이 책의 물리적 얄팍함을 한없는 정신적 두터움으로 변전시키고, 텍스트의 곳곳에 배어 있는 어두움과 침울함을 열정과 광기로 변전시킨다."

이 81세의 작가에게도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게 다예요> 에서 세월의 쏜살같음을 고통스러워하고, 죽는다는 것을 끔찍해 하며, 자신이 아직은 세상의 이편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러나 작가는 또한 자신이 직시하고 있는 그 제한된 삶의 시공간 속에서 사랑의 최대치를 이루는 데 남은 힘을 쏟는다.

사실 사랑을 절박하게 만드는 사정 가운데 큰 것은 죽음의 불가피성일 것이다. 영원히 사는 존재들에게 사랑은 아무런 긴장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사랑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 그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하는 잠재적 축복인지도 모른다.

독실한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사랑의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다음 세상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 믿음이 독실할수록, 현세의 사랑은 미미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신론자다. 즉 지금의 생을 유일한 생이라 여기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내세를 굳게 믿는 사람은 보통 광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뿐일 것이다.

종교를 지녔든 안 지녔든, 예배를 드리든 안 드리든,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내세에 대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죽음 따위가 왜 두렵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은 기쁨보다 훨씬 더 많은 슬픔으로 채워지는데.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불활(不活)로서의 죽음의 불가피성은 사랑의 소진되지 않는 연료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열정과 강도로서, 죽음에 맞선다. "나는 죽음이다. 바로 자연의 적이지./ 끝내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야 말지./ 모든 인간존재의 생명을 파괴하고,/ 모든 인간을 흙과 재로 만들어버리고 말지./ 나는 죽음이다. 나를 잔인한 자라고도 부르지./ 왜냐하면 모든 것을 종말로 인도하니까..."(피에르 미쇼, 고선일 역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 에서 재인용)라고 죽음이 뻐길수록,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사랑은 더욱 굳건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사랑의 최고치를 자살로 표현

그 사랑의 결사적 굳건함은 더러 죽음과 포개지기도 한다. 그 죽음은 흔히 자살이다. 그 때, 자살로 이어지는 절망은 사랑의 최고치이기도 하다. 세상에 가장 잘 알려진 사랑이야기에 따르면, 로미오는 줄리엣의 위장된 궂긴소식에 절망해 자살하고, 가사(假死) 상태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로미오의 진짜 궂긴소식에 절망해 자살한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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