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봉(태안 기름방제 봉사단) 모이세요.”
15일 오전 푸른 빛을 되찾은 바다를 품에 안은 충남 태안 구례포 해수욕장. 이상경(26ㆍ여)씨의 가녀린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사는 그의 주말은 태안행으로 시작된다. 기름유출 사고가 일어난 지난해 12월부터 주말이면 3시간을 달려 도착한 태안에서 방제 작업을 이끌고 있다. 28주 연속 봉사 활동이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80여명의 태기봉 회원들은 이씨의 지시에 따라 해수욕장에서 트럭과 승합차에 올라탄 뒤 서남쪽으로 2㎞ 비포장길을 더 달렸다.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는 곳에 이르자, 일행은 밧줄에 의지해 바위 암벽으로 이뤄진 해안가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이씨와 동료들은 파도를 뒤로한 채 쪼그리고 앉아 일일이 바위에 낀 기름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작업 속도는 늦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꼬박 매달렸건만, 아직도 바위 곳곳에는 찌꺼기가 그대로였다. 태기봉 회원 이영원(25)씨는 “강을 메워 산을 만드는 심정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봉사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다.
이씨는 기름 유출사고가 발생한 다음 주말인 지난해 12월16일부터 이날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일요일 태기봉 회원과 함께 태안을 찾고 있다. 이씨는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회원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겸손해 했다.
그는 “혼자하기 벅차리라고 여겨 만든 인터넷 카페에 1만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지금까지 기름 제거에 참여한 인원만 2,200여명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씨의 헌신적 노력이 알려지면서 태안 주민도 태기봉 회원들을 각별히 여긴다. 황촌2리 부녀회장 문원천(53ㆍ여)씨는 “다른 봉사단체와 달리 이씨는 일요일 봉사를 위해 하루 전에 도착해 현장 답사를 한다”며 “기름이 남아 있는 지역이 어디인지 미리 확인하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출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씨는 정보기술(IT) 업체에 다니는 평범한 서울 처녀였다. 그러나 온통 기름을 뒤집어 쓰고 새까맣게 죽어가는 TV속 갈매기 모습에 충격을 받아 태안 봉사를 결심했다. 그날 밤 갈매기 생각에 밤잠을 설친 이씨는 다음날 새벽차를 타고 태안으로 내려왔다.
처음 태안을 목격한 그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먼 바다부터 밀려오는 검은 물결은 백사장마저 삼켰고, 현기증 나는 기름 냄새는 TV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처참함이었다.
이씨는 “처음 한 달 동안은 ‘이번 한번만 더 가자’는 생각으로 내려왔으나, 매주 금요일만 되면 ‘또 내려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28주째 태안에 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씨는 부모의 태안에만 매달리는 막내 딸이 처음에는 마땅찮았다. 회사와 가족은 뒷전인 채 태안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그에게 어머니는 초기만 하더라도 “그만 하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이제는 부모도 이씨의 봉사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28주일 동안 힘들게 이어진 이씨 일행의 봉사도 이날이 마지막이었다. 태안군이 인위적 방제에서 벗어나 자연 방제로 정책을 바꾸면서, 더이상 봉사활동 단체에 활동증명서 등을 발급해주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두 번의 계절이 바뀌고, 수많은 사람이 애를 쓴 덕분인지 태안 앞 바다가 제 모습을 찾아가는 걸 보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태안이 어디에 위치한 지역인지도 몰랐던 이씨지만 이제는 두세 번씩 버스를 갈아타는 길이 전혀 낯설지 않다. 바다가 좋아, 바다가 죽어가는 게 안타까워 태안을 찾았던 그는 “오늘이 공식적으로 마지막 기름제거 봉사”라며 “하지만 앞으로도 태안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 때문일까.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씨는 정들었던 태안군 공무원, 마을 이장, 부녀회장, 태기봉 회원들과 안타까움에 꼭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태기봉 회원 신성수(36)씨는 “카페 아이디가 ‘초록별’인 것처럼 이씨는 지난 7개월 간 태안의 초록별로 살았다”고 칭찬했다. 신씨는 “태안의 초록별은 서울의 이상경으로 돌아가지만 영원히 태안 주민과 태기봉 회원 가슴속에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태안=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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