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사형(死刑)제 존폐 논란이 거세다. 국회가 사형폐지의원연맹을 결성하는 등 사형제를 없애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이례적으로 사형 집행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형제 존치 여론을 조성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아니냐는 의심까지 일고 있다.
논란의 계기는 17일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 법무성 장관 지시에 따른 사형수 3명의 형 집행이다. 이날 형장에서 사라진 사형수 가운데는 1980년대말 일본을 경악에 빠트린 연쇄 여아유괴살인범 미야자키 쓰토무(宮岐勤ㆍ45)가 포함됐다.
88년 8월부터 10개월에 걸쳐 사이타마(埼玉), 도쿄(東京)에서 4~7세 여아 4명을 유괴해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사체를 훼손하고 유기한 미야자키는 경찰의 사건 수사 중 피해자 가족에게 여아의 유골을 보내고 언론에 범행고백문을 전달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사 도중 그의 방에서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한 비디오테이프 6,000편이 나와 ‘오타쿠’(세상과 단절한 채 별난 취미에 골몰하는 사람)를 나쁜 의미로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경찰 조사에서 “쥐남자(애니메이션 등장인물)가 나타났다”면서 또 다른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하는 등 정신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 형사책임능력 유무가 논란이 됐다. 2006년 최고재판소가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범행”이라며 사형 확정 판결을 내리기까지 16년 넘게 재판이 진행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재판을 지켜본 일부 전문가들은 죽기 직전까지 범인이 피해자와 유족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은 것을 상기시키면서 “죄 값을 치른다는 의식이 없어 사형 집행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변호인들은 책임능력 문제를 다시 심사 받기 위해 지난달 말 재심 청구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법무성에 알렸다.
일본에서는 하토야마 장관 취임 이후 사형 집행이 급격히 늘고 있다. 지난해 취임 이후 2달에 한번 꼴로 벌써 13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역대 법무성 장관 중 가장 많다. 법원의 형 확정 판결 후 실제 사형 집행까지는 그 동안 평균 8년 정도가 걸렸지만 미야자키의 경우 고작 2년 5개월이 걸렸다.
이와 관련, 법무성의 고위 당국자가 “일부러 그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엄청난 사건의 범인을 사형 집행해 사형제의 의의를 국민에게 알기 쉽게 보여준 의의는 크다”고 말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전했다.
사형폐지의원연맹은 이날 “사형과 종신형을 둘러싼 국회 논의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정부를 강력 비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뿐이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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