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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 다자이 오사무 추모 열기

입력
2008.06.1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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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전후 일본의 대표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ㆍ1909~1948)가 19일로 타계 60주기를 맞는다. 생일이자 기일인 이날을 앞두고 일본 전역이 추모 열기로 뜨겁다. 허무와 퇴폐로 상징되는 세기말적인 작풍과 인간 내면을 꿰뚫는 천재성 넘치는 문장에 많은 팬이 매료돼 있다.

이날 다자이의 묘가 있는 도쿄(東京)도 미타카(三鷹)시 젠린지(禪林寺)에서는 기일행사 오토키(櫻桃忌)가 열린다.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지금은 기념관으로 이용되는 작가의 고향 아오모리(靑森)현 가나기(金木) 생가에서는 ‘다자이 탄생제’가 치러진다. 기일을 앞두고 요미우리(讀賣), 아사히(朝日)신문 등은 다자이 재조명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작가가 20대 후반에 1년 동안 머물며 작품을 썼던 야마나시(山梨)현 고후(甲府)시 현립문학관에서는 육필 원고와 소설 초판본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있다.

다자이는 패전을 전후해 일본 사회가 극도로 피폐한 시절 병약한 몸으로 술병을 끼고 살았던 별난 작가였다. 38세에 애인과 함께 도쿄의 하천 급류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 전까지 그는 평생 자신의 존재와 불화했다. “내가 태어난 집안은 자랑할만한 가계고 뭐고 없다. 어딘가에서 흘러와 이 쓰가루(津輕) 북단에 정착한 서민이 우리 선조임에 틀림없다. 나는 무지하고 변변히 먹지도 못하는 빈농의 자손이다.”

선대가 빈농이었던 것도 탐탁치 않았지만 조부 때부터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모아 지역 유지가 되고 귀족원 의원이 된 부르주아 계급인 부친을 그는 부정했다. 청년기 대지주를 고발하는 다자이의 습작들도 다수가 아버지를 모델로 한 것이다.

프랑스문학에 심취해 프랑스어 한 자도 모른 채 도쿄대 불문과에 입학한 뒤에는 좌익운동에 참가하느라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 졸업 구두시험에서 “한 사람이라도 아는 교수 이름을 말하면 통과시켜주겠다”고 했으나 결국 말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재학 중 카페 여종업원과 사귀다가 동반자살을 시도해 혼자 살아난 것을 시작으로 모두 네 차례나 이어진 자살 시도도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24세에 단편 <열차> 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교과서에 실린 <달려라 메로스> 를 비롯해 <만원(滿願)> <쓰가루> <사양(斜陽)> <인간실격>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죽기 직전 발표한 중편 <인간실격> 은 외부세계와 불화화는 자신을 그린 작품으로 드라마, 연극, 만화 등 다른 장르로 숱하게 각색됐다. 신초(新潮)문고본으로만 611만부가 팔려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ㆍ1867~1916)의 <마음> (637만부)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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