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광우스님, 70년 출가인생 굽이굽이 새긴 한국 비구니史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광우스님, 70년 출가인생 굽이굽이 새긴 한국 비구니史

입력
2008.06.19 00:20
0 0

70년 전 경북 상주의 남장사 선방에서는 어린 소녀가 참선하는 스님들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한여름이라 문을 활짝 열고 참선하는 데 꾸벅꾸벅 조는 스님들도 있었다.

소녀는 호기심이 발동해 살금살금 다가가 손가락으로 송곳을 만들어 살며시 한 스님의 턱 끝에 갖다 대고 고개가 꾸벅하기를 기다리는 데 그만 큰스님한테 들키고 말았다. 방선(放禪)한 뒤 엄하게 꾸짖는 큰스님에게 소녀는 철없이 물었다.

"왜 스님들은 꾸벅꾸벅 졸면서 앉아 있어요?"

"광우야!"

"네."

"대답하는 그놈이 무엇이냐? 어떤 놈이 있어서 대답을 하는 것이냐?"

소녀가 알 까닭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속가의 부친이기도 했던 조실 혜봉(慧峰ㆍ1874~1956) 선사가 말했다.

"바로 그 '모르겠다고 하는 놈'이 어떤 놈인지 그것을 찾기 위해 앉아 있는 거란다."

사범학교 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절에 갔던 열네살 소녀는 뭔가 모를 큰 의문이 생겼고 그것이 평생의 화두가 됐다. 소녀는 참선하는 스님들의 허락을 받아 어린 나이에 선방에 앉을 수 있었다. 일찍이 선방에서 없었던 일이었다.

서울 삼선동 정각사 광우(光雨ㆍ83) 스님의 출가 인생은 이렇게 시작돼 한국 비구니계의 역사와 함께 했다. 광우 스님이 출가 70년을 맞아 그간의 출가수행담을 정리한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 (조계종출판사)를 펴냈다. 최정희 전 현대불교신문 편집국장이 질문을 하고 광우 스님이 대답을 한 대담집의 형태로 스님의 삶을 정리했다.

17일 오후 정각사에서 기자들과 만난 광우 스님은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꼿꼿했다. "수고스럽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스님은 머뭇거리면서 조금씩 옛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부친 혜봉 선사는 조선말 고종 시절 궁내부 관리를 지내다 출가했고, 그 뒤를 이어 광우 스님이 어머니와 함께 출가했으니 온 가족이 불문(佛門)에 들었다. 광우 스님의 삶을 되짚어보면 그것이 바로 한국 비구니계의 역사이다. 스님은 1944년 한국 최초의 비구니강원인 남장사 관음강원의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생이다.

스님은 "일제 말이던 당시는 처녀들을 정신대로 뽑아가던 시절이라 비구니 스님들도 겁이 나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이 강원은 3년 만에 해산하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광우 스님은 비구니로서는 처음으로 56년 4년제 정규대학(동국대 불교학과)을 마쳤다. 당시 비구니가 대학을 다닌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던 시절이라 남학생처럼 상고머리에 양복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67년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전신인 '우담바라회'를 결성하는데 앞장섰고, 95년에는 두 번째로 전국비구니회 회장이 됐고 서울 수서에 전국비구니회관을 건립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2007년에는 조계종에서 처음으로 비구의 대종사에 해당하는 명사(明師) 법계를 받았다.

광우 스님은 66년 정각사를 창건해 도심포교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일요법회, 어린이법회, 중고교생법회 등을 처음으로 열었는데 김동화, 원의범 등 한국불교의 석학들이 강의를 해 서울시내의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불교계 최초의 문서포교지 '신행불교'를 30여년간 발행하기도 했다.

스님은 특히 시주금을 절 살림을 늘리는데 쓰지 않고 불교 공부를 하는 젊은 스님, 학생들을 키우는데 써 학승과 불교학자들의 대모(代母)로 불린다. 소르본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호진 스님,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미산 스님 등 이름 난 학승과 불교학자들 가운데 광우 스님의 도움을 받은 이가 많다.

광우 스님은 지금도 40, 50년 된 가재도구들을 버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이번에 제자들이 시내 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으나 "모두 어려운데 중이 세상에 보탬이 돼야지 그럴 수 없다"며 물리치고 일일이 200여명에게 전화를 걸어 행사를 취소시켰다.

스님은 책에서도 뭔가 깨달았다거나 어떤 경지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감춰둔 것이 있으면 한번 얘기해달라는 주문에 스님은 "감출 게 뭐 있어. 없으니까 그렇지"하고 사양했다. 출가생활 70년 동안 부처님 법대로 지키고자 한 것 가운데 한가지만 꼽아달라고 하자 "수행"이라고 했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