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가 예전 같지 않은 데에는 부시 행정부 들어 정책운용능력이 떨어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달러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탓이 크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국가간 거래를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결재하고 유럽 밖에서도 유로화와 달러화를 결재화폐로 병행하는 나라가 늘어났다. 그러니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는 ‘공장’으로서 누리던 ‘화폐발행이득(seignorage)’이 현격하게 줄었다.
왕년에는 세계 모든 나라간 거래가 달러로 이뤄지고 나라마다 중앙은행이 달러를 기본으로 비축해두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실제 가치 이상의 달러화를 언제든지 필요하면 찍어댈 수 있었다.
전세계에서 잠자고 있는 달러만큼의 실질가치는 오롯이 미국몫으로 떨어졌다. 그러니까 미국의 경제가 강한 것은 미국의 경제규모가 크고 창의적인 인간들이 모여들어서라기보다는 세계 기축통화를 찍어내는 덕분이 컸다.
달러화의 약세는 세계 시장에서 유로화의 영역이 커지면서 예측됐던 일이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서도 아시아화에 대한 논의가 나왔으나 일본과 중국의 기대가 전혀 다르다 보니 진전이 없다. 물론 한국은 별다른 의견조차 없었다.
■ 달러 밀어주는 북한
북한은 말끝마다 반미를 외치는 나라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미국 시장을 적극 떠받치는 힘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에 적대적인 부시 정부의 정책에 맞서 유로화로 결재통화를 바꾸겠다고 호언했지만 실제로 한국정부나 기업과 거래하면서 받는 돈은 달러화이다.
북한으로서는 한국에서나마 달러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겠지만 그 때문에 그들이 혐오하는 미국을 지원해주는 무수한 지네발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은 없다고 밝혔다. 남한의 지원을 받으려면 북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변화에는 남북한 가족상봉의 재개나 협상 테이블로의 복귀, 핵문제에 대한 투명성 확보 등등이 포함된 것일 것이다.
북한은 남한이 조건을 내세우면서 지원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자존심이 상해서 남한 정부를 비난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니 같은 조건으로 양측에 변화를 바란다는 것은 서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뿐이다.
그래서 남북한이 ‘한반도통화’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으로 새로운 관계 정립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제안한다.
■ 한반도통화나 원화결재 검토하길
남한은 북한에 조건 없이 식량지원을 하는 대신 북한은 적어도 남북관계에서만이라도 달러화가 아닌 대한민국 원화를 결재화폐로 삼는 것이다. 대한민국 원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남북한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한반도통화를 논의해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나라이면서도 유로화를 함께 쓰는 유럽공동체처럼 남북한도 함께 쓰는 통화를 구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한반도통화가 남북한과 거래하는 모든 나라로 번져간다면 그에 따른 반사이익은 꽤 크다. 21세기에 들어 동남아와 서남아에서 한국 경제의 영향력은 꽤 커졌지만 이것이 원화 활용으로 이어진 정도는 미미하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공동체에 비하면 똑같은 거래를 해도 진짜 수익이 적다.
남한이 북한을 도와온 지 오래 됐다. 이제는 북한도 남한과 대등한 관계에서 남한을 도울 때가 왔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북한 방문 허용처럼, 폐쇄성을 떨쳐버리는 정도를 조건으로 한국의 인도적인 지원을 기대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진짜 한국을 도와주는 방법으로 한국을 도와줄 수 있다. 그게 바로 한반도만의 ‘통화발행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냉랭해진 상황에서 생뚱맞는 소리 같겠지만 바로 지금이 이런 논의를 준비하고 시작할 시기이다. 물론 그 논의에는 북한의 화폐와 원화를 맞교환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교하게 들어있어야 할 것이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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