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 민음사
장마가 시작됐다는 소식이다. 윤흥길(66)의 <장마> (1973)가 떠오른다.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장마>
<장마> 는 올해로부터 58년 전 유월의 장마에 벌어진 이야기다. 6ㆍ25 중의 한 농촌, 소년의 집에는 할머니와 부모, 피난 온 외할머니와 이모가 함께 살고 있다. 외할머니는 가끔 소년에게 묻는다. "오삼춘이 존냐, 친삼춘이 존냐?" 육군소위인 소년의 외삼촌은 얼마 전 전사통지서가 왔다. 친삼촌은 외할머니가 '뿔갱이'라 부르는 빨치산이다. 그런 아들을 둔 두 할머니가 한 집에 살며 반목한다. 빨치산 소탕으로 모두들 소년의 삼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할머니는 아들이 살아있을 거라 믿으며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느날 동네 아이들의 돌팔매에 쫓겨 구렁이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온다. 외할머니는 그 구렁이를 소년의 삼촌의 환생으로 보고, 무속으로 달랜다. "자네 보다시피 노친께서는 기력이 여전허시고 다른 식구덜도 모다덜 잘 지내고 있네. 그러니께 집안일일랑 아모 염려 말고 어서 어서 자네 가야 헐 디로 가소." 그렇게 외할머니와 할머니는 화해하고, 할머니는 얼마 후 숨을 거둔다. 장마도 끝난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소설은 끝맺는다. 장마>
윤흥길의 이 빼어난 소설은 분단문학의 백미다. <장마> 에서 증오와 죽음과 밀고의 비극에 휘둘렸던 한 집안은 화해하지만, 이 땅은 여전히 '지루한 장마' 속에 있다. 윤흥길의 섬세한 문장을 다시 인용해본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이 악의에 찬 빗줄기를 주룩주룩 흘리곤 했다. 아무 데나 손가락으로 그저 꾹 찌르기만 하면 대꾸라도 하는 양 선명한 물기가 배어나왔다. 토방이 그랬고 방바닥이 그랬고 벽이 그랬다. 세상이 온통 물바다요 수렁 속이었다." 장마>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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