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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장마

입력
2008.06.1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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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 민음사

장마가 시작됐다는 소식이다. 윤흥길(66)의 <장마> (1973)가 떠오른다.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장마> 는 올해로부터 58년 전 유월의 장마에 벌어진 이야기다. 6ㆍ25 중의 한 농촌, 소년의 집에는 할머니와 부모, 피난 온 외할머니와 이모가 함께 살고 있다. 외할머니는 가끔 소년에게 묻는다. "오삼춘이 존냐, 친삼춘이 존냐?" 육군소위인 소년의 외삼촌은 얼마 전 전사통지서가 왔다. 친삼촌은 외할머니가 '뿔갱이'라 부르는 빨치산이다. 그런 아들을 둔 두 할머니가 한 집에 살며 반목한다. 빨치산 소탕으로 모두들 소년의 삼촌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할머니는 아들이 살아있을 거라 믿으며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느날 동네 아이들의 돌팔매에 쫓겨 구렁이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온다. 외할머니는 그 구렁이를 소년의 삼촌의 환생으로 보고, 무속으로 달랜다. "자네 보다시피 노친께서는 기력이 여전허시고 다른 식구덜도 모다덜 잘 지내고 있네. 그러니께 집안일일랑 아모 염려 말고 어서 어서 자네 가야 헐 디로 가소." 그렇게 외할머니와 할머니는 화해하고, 할머니는 얼마 후 숨을 거둔다. 장마도 끝난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소설은 끝맺는다.

윤흥길의 이 빼어난 소설은 분단문학의 백미다. <장마> 에서 증오와 죽음과 밀고의 비극에 휘둘렸던 한 집안은 화해하지만, 이 땅은 여전히 '지루한 장마' 속에 있다. 윤흥길의 섬세한 문장을 다시 인용해본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이 악의에 찬 빗줄기를 주룩주룩 흘리곤 했다. 아무 데나 손가락으로 그저 꾹 찌르기만 하면 대꾸라도 하는 양 선명한 물기가 배어나왔다. 토방이 그랬고 방바닥이 그랬고 벽이 그랬다. 세상이 온통 물바다요 수렁 속이었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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