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ㆍ10 촛불대행진’ 당시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 ‘명박 산성’이 생겼다. 시위대의 청와대쪽 진출을 막기 위해 이순신 장군 동상을 가로막고 설치된 대형 컨테이너 박스 더미를 네티즌들은 그렇게 불렀다.
산성의 앞면만 가로 3개, 폭 2개, 높이 2개(총 12개)로 축조됐으며, 뒤쪽(시위대 반대쪽)엔 쇠줄과 쇠말뚝으로 길바닥에 단단히 매여져 있었다. 총 무게는 48톤이며, 가로 36m, 폭 4.7m, 높이 4.7m였다. 경찰이 이러한 규모의 산성을 축조하는 데는 불과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밤새 감행된 시위대의 공성에도 성벽은 끄떡하지 않았다.
■컨테이너 박스가 연일 화제다. 이번엔 물류대란이다. 세계 5위로 큰 부산항에 시시각각 산처럼 쌓이고 있다. 1944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유럽에서 미ㆍ영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으로 수송하기 위해 야적한 군수물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컨테이너 박스는 바로 그 과정에서 개발됐고,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적으로 규격화했다.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 속에서 자란 셈이다. 일본 오키나와의 한 미군기지 전략사무실은 10여 개의 컨테이너 박스로 돼 있는데, 유사시엔 통째로 수송기에 싣고 현장으로 날아간다.
■컨테이너는 ‘실용’의 상징이다. 1950년대까지 미국에선 항만 인부들이 트럭으로 운반된 화물들을 어깨 짐으로 날랐다. ‘트럭을 아예 통째로 배에 실을 수 없을까’ 궁리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떠올린 사람은 미국인 말콤 맥린(Malcolm Mcleanㆍ1913~2001)이었다. 화물운송 사업을 하다 해운회사 시랜드(Sea Land)를 차린 그는 대형 트렁크에 비유되는 ‘강철 박스’로 세계 물류의 흐름을 바꿨다. 지난해 <포브스> 지(誌)는 컨테이너 박스를 ‘20세기를 확 바꾼 85대 아이디어’에, 그를 ‘최근 50년 동안 세계를 바꾼 15인’에 선정했다. 포브스>
■실용적 발명품이 인력의 저항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컨테이너 박스가 발명되자 일거리를 잃게 된 하역 인부들의 저항이 극심해졌고, 세계 최강의 항만노조가 미국에서 생긴 배경이 됐다. 지구촌 교역의 총아인 컨테이너 박스의 이면엔 이러한 전쟁과 투쟁의 역사가 배어있다. 헌데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컨테이너=투쟁’의 이미지가 생기고 있다. 경찰이 축조한 ‘산성’에서, 붉은 깃발 나부끼는 물류대란의 현장에서 “나, 알고 보면 불행한 과거가 많아요. 제발 나 좀 내버려 둬요”, 컨테이너 박스들의 생생한 하소연이 들린다.
정병진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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