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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천엔 지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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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의 이것이 오늘의 미술!]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천엔 지폐 사건'

입력
2008.06.1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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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예술을 갈구한 예술' 법정에서 펼친 아방가르드

아카세가와 겐페이(赤瀬川原平ㆍ71)는 전후 일본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인물이다. 요코하마 출신의 청년은, 동경올림픽이 열리기 전해인 1963년 5월, 동년배인 다카마스 지로(高松次郎), 나카니시 나쓰유키(中西夏之)와 함께 ‘하이레드센터’란 이름의 전위예술그룹을 결성했다.

조직의 알쏭달쏭한 이름은 다카마스, 아카세가와, 나카니시 3인의 이름 앞 글자-高(high), 赤(red), 中(center)을 모아 영역한 결과다.

하이레드센터는, 캔버스와 의자 따위를 포장지와 밧줄로 결박한 채 작품으로 전시하거나 온몸을 빨래집게로 집어놓고는 예술 시험이라고 주장하는 등, 상식을 뒤엎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는 오카모토 타로(‘일본의 피카소’쯤 되는 인물) 같은 앞 세대의 예술가들이 청년들에게 던진 질문-“오늘날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강렬한 화답이었다. 물론 청년들의 일관된 논리는 “이것도 예술이 아니고, 저것도 예술이 아니다”라는 것이지만.

‘예술이 아니기를 갈구하는 예술’은 결국 큰 문제를 야기했다. 아카세가와의 <모형 1,000엔 지폐> 연작 일부가 위폐로 간주돼 법정에 소환된 것. 쇼토쿠 태자가 그려진 1,000엔 지폐를 실물 크기로 인쇄해 포장지로 활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1966년 도쿄 지방 재판소 701호에서 시작된 소위 ‘1,000엔 지폐 사건’의 공판은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전개됐다. 자신이 행한 일이 ‘예술’이 아니라면, 결국 ‘범죄’가 돼, 유죄 판결을 받을 판이었다. 그러므로 작가는 여태까지의 주장을 180도 뒤집어, “이것도 예술이고, 저것도 예술이다”라는 논리를 폈다.

호기어린 작가는 재판을 예술적으로 활용했다. 각종 작품을 재판정에 보기 좋게 늘어놓고는, 하나하나 진지하게 판사 앞에서 펼쳐보였다. 재판정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연장이 되고 말았다.

압권은 나카니시의 빨래집게 작품이었다. 피고 측은 퍼포먼스의 대가인 히지카타 타츠미의 수제자를 데려다가 온몸을 빨래집게로 집어놓고는 증거물로 제시했다. 한 시간 넘도록 진행된 진지한 호들갑이 끝을 맺고, 변호인과 피고인이 자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예술품으로서 법정을 서성거리던 빨래집게 청년.

재판장이 “이제 당신의 역할은 끝났으니, 제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작품은 이렇게 되물었다: “저, 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판사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의 정적에 이어, 폭소가 터졌다.

젊은 예술가들의 한판승이었지만, 결과는 유죄였다. 두 차례 항소했지만, 1970년 아카세가와는 유죄확정판결(징역 3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작가는 미술보다는 글쓰기에 의욕을 보였는데, 문학계에선 오츠지 카츠히코(尾辻克彦)란 필명을 썼다. 오츠지는 1981년 <아버지가 사라졌다> 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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