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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7> 엇갈리다-결정론의 감옥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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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17> 엇갈리다-결정론의 감옥 안에서

입력
2008.06.1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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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두사 ‘엇-’은 주로 용언 앞에 붙어 ‘어긋나게’, ‘비뚜로’, ‘비스듬히’ ‘조금’ 따위의 뜻을 나타낸다. 엇갈리다, 엇나가다, 엇눕다, 엇걸다, 엇겯다, 엇꼬다, 엇깎다, 엇붙다, 엇물리다, 엇붙다, 엇섞다, 엇비뚜름하다, 엇구수하다, 엇비슷하다 따위의 용언에 이런 뜻의 접두사 ‘엇-’이 보인다.

의미적으로 ‘엇-’의 맞은편에 있는 접두사를 굳이 찾자면, ‘맞-’이 있을 것이다. ‘맞-’은 ‘걸맞게’ ‘마주’의 뜻을 지녔으니 말이다. 엇각이나 엇시조에서처럼 ‘엇-’이 체언과 어울리는 일은 비교적 드문 데 비해, ‘맞-’은 용언과 체언을 가리지 않고 두루 잘 어울린다.

맞물리다, 맞걸다, 맞겨루다, 맞닿다, 맞당기다, 맞서다, 맞들다, 맞각, 맞고소, 맞단추, 맞담배질, 맞불, 맞바람, 맞장구, 맞선 따위의 말이 이런 뜻의 접두사 ‘맞-’으로 시작한다.

'엇-'의 상대되는 접두사는 '맞-'

‘엇갈리다’는 ‘서로 어긋나서 맞물리지 못하다’의 뜻이다. 옹녀와 변강쇠의 질퍽한 사랑이든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박열(朴烈)의 이념적 사랑이든, 모든 사랑은 이 엇갈림을 용케 피해서 맞물렸다. 그것은 또 모든 사랑이 무수한 엇갈림들을 딛고 맞물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린이라는 여자와 제라르라는 남자가 20대 푸른 나이의 어느 눈 오는 날 처음 만나 함께 춤을 추러 갔고, 그것이 인연이 돼 60년 가까이 금실 좋은 부부로 살다가 한 날 한 시에 자살했다면, 그 둘의 사랑에는 수억의 엇갈림이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도린과 수억 사내와의 엇갈림이, 그리고 제라르와 수억 여자와의 엇갈림이. 도린과 제라르는 그 무수한 잠재적 맞물림을 기회비용으로 치르고 저들만의 사랑을 완성했다.

그런데 이런 낭만적 사랑, 단 하나의 진정한 맞물림 앞에도 바로 그 연인들의 엇갈림이 있을 수 있다. 피터 챌섬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세렌디피티> (2001)는 바로 그런 ‘운명적 사랑’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엇갈림 이야기다.

새러(케이트 베킨세일)와 조너선(존 쿠색)은 성탄 전야에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나 그 길로 첫 데이트를 하지만, 그로부터 7년 뒤에야 다시 만나 사랑을 재가동(再稼動)한다. 그 7년은, 사랑이란 무릇 우연에 달려 있으므로 일단 자신들의 사랑운(運)을 시험해보아야 한다는 새러의 고집 때문에 생긴 이별의 세월이다.

새러는 지니고 있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안표지에다 제 연락처를 적은 뒤 그 책을 팔아치워 버린다. 그 책이 우연히 조너선의 손에 들어가면 그들의 사랑은 필연이 되는 것이다.

그 때야, 그들의 우연적 사랑은 필연적 사랑이 된다고 새러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언제 맞물리게 될지 모를, 도대체 그게 언제든 맞물리게나 될지조차 알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을 엇갈림의 주사위 놀이에 내맡긴다.

조너선은 새러와 달리 사랑의 행로는 당사자들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새러의 제안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그 뒤 그들은 서로를 찾기 위해 애쓰면서 수없이 엇갈린다. 새러로서는 조너선을 만나려 애쓰는 것 자체가 우연이 곧 필연이라는 제 생각과 어긋나는 것일 텐데? 다행히 우연은 그녀 편이었다.

조너선에게 우연히 그 헌 책이 걸려들어 그가 새러의 행방을 찾느라 약혼녀와의 결혼식에 시간을 대지 못함으로써, 그 둘은 마침내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엇갈림에 대한 이 가벼운 영화는 자유(의지론)와 결정(론)에 대한 생각거리를 남긴다. 새러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특정한 시점에 섹스를 하지 않았다면 새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 특정한 시점에 섹스를 했더라도 남자의 무수한 정자 가운데 특정한 정자가 여자의 난자와 결합하지 않았다면, 그 두 사람의 자식은 새러가 아닐 것이다.

'자유-결정' 생각케 하는 한 영화

그렇게 우연히(또는 필연적으로) 태어난 새러가 두 살 때 홍역을 앓았다면(실제로는 네 살 때였다 치자), 다섯 살 때 2층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면(실제로는 굴러 떨어졌다 치자), 일곱 살 때 피자를 급히 먹고 체했다면(실제로는 여덟 살 때였다 치자), 열두 살에 초경을 하지 않았다면(실제로는 열세 살 때였다 치자), 그 뒤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었다면(실제로는 겪지 않았다 치자), 그 뒤 이런저런 행위들을 하지 않았다면(실제로는 했다 치자), 어느 해 성탄 전야에 바로 그 백화점에 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조너선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너선과 영원히 엇갈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 가운데 새러의 자유의지에 말미암은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녀가 선택했다고 판단되는 행위들은 새러의 몸(뇌를 포함해)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새러의 환경에 반응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새러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엄격한 자연법칙에 매여 있어서, 그것들이 실제로 한 운동과 다른 운동을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새러는 자신이 실제로 한 일과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결국 새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새러는 자유롭지 않다. 당신과 내가 자유롭지 않듯.

불교에서는 결과를 내는 내적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외적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한단다. 이를테면 보리는 그 씨가 인(因)이고, (인간의) 노력이나 자연이나 거름이 연(緣)이라는 것이다. 거칠게 견주자면 인(因)은 유전자나 타고난 그릇에 해당할 테고, 연(緣)은 환경이나 노력에 해당할 테다.

그러나 보리의 ‘인’과 ‘연’을 보리가 자유롭게 고를 수 없듯, 새러의 ‘인’과 ‘연’도 새러가 자유로이 고르지 못한다. 새러의 재능이나 성격은 새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새러가 겪은 이런저런 사건들도 새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백화점에서 새러가 분홍 드레스와 보랏빛 드레스 중 보랏빛을 골랐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녀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순간 새러를 구성하는 입자들의 운동상태, 그것이 낳은 새러의 기분상태, 그 옷을 입고 참가할 파티의 성격 따위는 새러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러는 어떤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이 자유롭다고 그녀가 느낄 순 있겠지.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자유롭지 않다.

통제할 수 없기에 '우연은 곧 필연'

이런 결정론 앞에서 사람은 보잘것없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그 순간에도 미리 결정된 대로 움직이고(심지어는 생각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우리가 한 남자를, 또는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겪는 수많은 엇갈림도 미리 결정돼 있고, 그 수많은 엇갈림 뒤에 한 여자와 또는 한 남자와 맞물리는 것도 미리 결정돼 있으며, 그 남자 또는 여자와 백년해로를 할지 세 해 만에 이혼을 할지도 미리 결정돼 있다.

결국 결정론 안에서, 모든 우연은 필연이다. 가능세계는 수도 없이 상상할 수 있겠지만, 실현되는 세계는 오직 하나이므로. 적어도 우리의 경험 안쪽에서는 말이다.

상당한 정도의 미결정성이, 곧 우연이 지배하는 양자역학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사태를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즉 우리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연은 필연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엇갈림으로부터 우리가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의 엇갈림이나 맞물림이 사람의 자유의지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니 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자체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것은 미리 결정돼 있다. 자유의지란 환상일 뿐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도 이미 결정돼 있었다.

그러나 결정론이라는 과학적 세계관이 사람을 사악하고 무력하게 만들 것은 확실하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또는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제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니까. 말하자면 제가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까.

결정론의 세계엔 윤리와 책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아니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짐짓 주장해야 한다. 어떤 행위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행위자는 책임에 비례해 벌이나 상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내 연인을, 내 아내나 남편을 내가 골랐다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사랑의 엇갈림이나 맞물림조차 자유의지로 피하거나 이룰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어떤 선택(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도 우리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인간이 자유롭다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 자기기만조차 이미 그리 되도록 결정된 것이겠지만.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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