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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내셔널리즘 현장을 가다] <2> 식량 파동, 세계화가 낳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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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내셔널리즘 현장을 가다] <2> 식량 파동, 세계화가 낳은 비극

입력
2008.06.17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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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방콕에서 북쪽으로 약 70㎞ 떨어진 아유타야. 14세기 이후 400여년 동안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였던 이 곳은 차오프라야강(江) 하류의 삼각주에 발달한 벼농사의 중심지이다. 10일 아유타야 외곽의 평야지대에서는 이모작을 마치고 삼모작을 준비하기 위한 논갈이가 한창이었다.

▲ 쌀 수확 늘었지만 소득은 오히려 줄어

아유타야에서 80라이(약 12.8㏊) 규모의 벼농사를 짓는 잠룽(50)은 “올해 쌀 수확이 지난해보다 조금 늘었지만 소득은 오히려 줄어들 것 같다”고 한숨부터 쉬었다. 잠룽이 걱정하는 것은 유가 인상에 따른 비료값 상승이다.

태국에서는 올해 초 리터당 27바트(약 850원)이던 유가가 40바트(약 1,268원) 수준으로 뛰었고, 비료값 역시 3배 이상 올라 생산비 상승분이 수익의 상승분을 앞질렀다.

잠룽은 “정부가 수출물량을 늘리기 위해 경작지 확대를 장려하고 있지만 비료값 안정 등 정작 농가에 절실한 정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며 “땅을 빌려 경작하는 가난한 농민들의 상황은 심각하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3배 가까이 쌀값이 폭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경제적 과실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은 태국도 예외가 아니다.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태국의 상황이 이렇다면 전 세계로 확대된 식량 파동은 저개발국일수록, 빈곤층일수록 고통이 심할 수밖에 없다.

현재 저개발국의 70% 정도가 곡물 수입국이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식량 파동, 식량 폭등이라고 하지만 정작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에게는 남의 잔치일 뿐이다.

프라서트 고살비트라 태국 농무부 쌀 담당국장은 “쌀값 폭등은 태국 경제의 위협이자 기회”라고 진단했다. 주식인 쌀 가격의 폭등이 가난한 농민의 주머니를 가볍게 한다는 점에서 위협이지만 정부가 쌀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많은 경작지를 임대해주면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기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농민들도 정부와 같은 생각을 할까.

▲ 내수 안정 요구하는 목소리 높아

태국 농민들은 쌀값 급등을 기회로 보지 않는 듯 했다. 태국 유력지인 방콕포스트는 6일자 사설에서 “몇 달 전만 해도 태국의 농민과 수출업자, 정미업자들은 모두 국제 쌀값이 급등하자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면서 “그러나 일부 수출업자와 정미업자들이 유동성을 이유로 구매를 중지하면서 쌀값이 톤당 6,600바트 수준으로 하락,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수출을 강조하면서 내수는 돌보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쌀 수출업체를 운영하는 찬차이 락타나논은 “쌀 생산은 단기간에 급증할 수 없는데도 정부가 수출만 강조해 비축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정부의 경작지 확대 정책에 따라 경작지 가격도 동반 상승해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쌀 생산에 따른 비용 폭등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태국의 쌀 농민연합은 이달 초 정부의 구체적인 지원책이 없으면 방콕 시내 도로를 점거하는 시위에 돌입하겠다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사막 순다라벳 총리는 4일 긴급 소집한 내각에서 수확 예정인 쌀을 현재 거래가보다 높은 톤당 1만4,000바트에 수매한다고 발표했다. 쌀값 및 유가 급등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민심을 잃은 정부가 일종의 보조금 정책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정치적 해결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 시장 개입에 반대해 온 밍크완 상수완 상무장관이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참석차 페루를 방문한 틈을 타 전격 발표한 것이어서 “국내 쌀값 안정을 둘러싼 부처간 정책 조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내놓은 급조된 처방”이라는 언론의 따가운 비판을 받았다.

▲ ‘세계화’의 비싼 대가 치러

비축미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태국과 달리 내수 시장이 그리 안정적이지 않은 베트남 인도 등 다른 주요 쌀 수출국들은 벌써 ‘빗장 걸기’에 나섰다. 밀 옥수수 콩 등 주요 곡물 수출국들도 국내 수급 안정을 위해 수출을 제한하고 비축량을 늘리고 있다.

프라서트 국장은 “태국 쌀 수출에 대해 BBC 방송을 포함, 싱가포르 홍콩 등의 세계 언론들의 질문이 빗발치고 있다”며 “국제 쌀값 안정을 위해 태국은 쌀 수출을 지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태국은 태국산 쌀값이 톤당 1,000달러를 넘어선 4월 베트남 캄보디아 등과 함께 ‘쌀수출국기구(OREC)’라는 카르텔을 추진, 수입국들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식량자원 민족주의는 곡물의 수급에 대한 불안감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개도국의 식량 수요와 바이오 연료용 수요 증가로 세계 곡물 비축량은 2000년 30.4%에서 올해에는 14.9%으로 급감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

공급 측면에서는 기상이변에 따른 생산 감소, 우루과이 라운드 등 국제적 시장개방을 유도한 세계화의 역풍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화로 인해 값싼 수입 농산물이 밀려들자 일부 국가의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하면서 식량파동에 취약한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관광산업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쌀 수출국에서 세계 최대 쌀 수입국으로 전락한 필리핀은 ‘식량의 세계화’로 인해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대표적인 국가이다.

식량은 냉장고나 TV 같은 공산품과는 다르다. 곡물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정치ㆍ사회ㆍ안보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세계화는 간과한 것이다. 똑같은 시장의 논리를 들이대 투기자본에 노출시킨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의 성명환 연구위원은 “세계화를 강조하던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이 자국 농업 보호를 이유로 식량의 자유로운 유통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며 “식량파동과 식량자원 민족주의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암마르 시암왈라 태국 개발연구소장

암마르 시암왈라 태국 개발연구소 소장은 "5개월만에 3배 가까이 급등한 만큼 당분간 톤당 1,000달러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올해 국제 쌀 시장을 전망했다. "세계 각국이 쌀 수출 대국인 태국을 주시하고 있고, 태국 정부도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쌀값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 다른 쌀 수출국들과 달리 태국이 수출 기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생산이 꾸준하고 비축량도 풍부한 편이다. 태국은 쌀이 주식이고 밀은 부식이다. 하지만 다른 쌀 생산국인 인도와 중국은 쌀과 밀을 모두 주식으로 소비한다. 두 곡물로부터 '이중 부담'을 느끼므로 우리보다 위기의 강도가 더 셀 것이다."

- 태국이 공급을 제한한다면 산유국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국제사회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다. 사막 순다라벳 태국 총리가 주장했던 쌀수출국기구(OREC) 발상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간단히 말해 쌀은 석유와 달리 기후의 영향이 심하고 생산과 저장에 시간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건이 많이 다르다."

- OREC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어땠나.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런 정부 입장 때문에 쌀 생산자와 수출업자의 불신만 커졌다. 정부는 이보다는 쌀 설탕 육류 등 식품 값을 안정시킬 대책을 내놓는 게 먼저다. 물가를 잡지 못하는데 쌀값만 높여 수출하자는 것은 공허한 발상이다."

- 세계화로 인해 빈농이 더욱 고통받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정부는 빈농을 위해 경작지를 제공한다는 정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들은 기술이 부족해 고용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상업화한 농장과 경쟁 하는 것은 무리이다. 부농들은 앞선 경작기술과 기계화 등을 앞세워 가난한 농민들의 경작지까지 장악할 수 있다. '부익부 빈익빈'을 보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비교우위를 추구하는 경제논리에 따른다면 경작지 제공은 해결책이 아니다."

- 태국은 식량파동에서 안전한가.

"태국 정부는 쌀 이외의 식량안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육류 밀 설탕 등 식료품을 수입하기 때문에 안전지대라고 보지는 않는다. 정부간 거래에 쌀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콕ㆍ아유타야=김회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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