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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2〉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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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교수 대장정 길을 가다]〈2〉마오, 농민을 발견하다

입력
2008.06.12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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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창(南昌) 다음의 행선지는 추수폭동의 현장이자 마오의 고향인 창사(長沙). 창사는 후난(湖南)성 최고의 관광지인 장지아지에(張家界)를 가본 이들이라면 중간에 들렀을 후난성의 성도이다. 난창에서 창사까지는 530km로 도로사정이 나빠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행히 추수폭동기념관은 창사시 70km 못 미친 원자(文家)시에 위치해 오후 5시 전에 도착했다. 내부 수리 중이어서 닫힌 기념관에 다행히 수위실 직원이 있어 이곳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왔다고 하자 문을 열어 줬다.

원자시는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등 후난지역 공산당원들이 창사부근의 여러 지역에서 추수폭동 후 국민당군의 추격을 받자 이곳에 모여 창사 공격을 포기하고 징강산(井岡山)이 있는 남쪽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그 곳에 유격기지를 만들어 지구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곳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자 난창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향해 장총을 형상화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농민봉기를 상징하기 위해 장총과 횃불을 든 농민의 손을 형상화했다. 기념관 안에는 추수폭동에 관한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농민, 혁명 중심에서 소외층으로

추수폭동은 후에 중국혁명의 주동력이 된 농민이 처음으로 중국현대사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전까지 중국공산당은 러시아혁명의 경험과 이에 기초한 코민테른의 지도에 의해 농민이 아닌 노동자를 혁명의 중심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의 학살로 끝나기는 했지만 상하이(上海)의 노동자 봉기가 보여주듯, 그 때까지만 해도 기존질서에 전투적으로 저항해 싸운 건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추수폭동을 통해 중국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압제에 저항해 무기를 든 것이다. 장정에 참여한 홍군 중 농민은 노동자(30%)보다 두 배 이상 많은 68%였다. 다시 말해 현재의 중국을 가능케 해준 일등공신은 농민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재 농민, 특히 농민출신으로 도시에서 불법노동일을 하고 있는 농민공, 그리고 노동자는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소외세력이다. 물론 개혁개방에 따른 경제발전으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다수 농민들이 절대빈곤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은 심각하다. 중국사회과학원이 최근 지난 10년간의 개혁성과의 분배율을 조사한 결과 공무원(29.2%), 연예인(20.2%), 민영기업주(자본가)와 자영업자(17.7%), 국영기업 및 집단기업 간부(16.1%) 등이 많은 수익을 나누어가진 반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공(0.5%)과 농민(1.3%)은 노동자(0.9%)와 함께 가장 수혜를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혁명은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인가.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해 최근 후진타오(胡錦濤) 정부는 농촌세를 폐지하는 혁명적인 조치를 취했다. 유구한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농민들이 소작료나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심각한 도농간 양극화 해결에는 역부족이다. 이 같은 생각을 하며 우울한 기분으로 기념관을 나왔다.

저녁은 후난식으로 했는데 역시 명성대로 매웠다. 후난 출신답게 매운 음식을 좋아한 마오는 평소 “혁명가는 매운 것을 잘 먹어야 한다”며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중국명 이더ㆍ李德)을 놀리곤 했다는데, 그래서 호남출신에 혁명가들이 많은 것인가?

마오의 생가로 가는 비포장길

샤오산(韶山)은 창사에서 서남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자리잡은 이 곳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잡혔을 정도의 오지이다. 길조차 없던 이 곳에서 마오는 태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국부가 된 마오의 생가 아닌가. 따라서 샤오산을 찾아가는 길은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길이 비포장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북한 같으면 아스팔트로 잘 닦아놓았을 텐데 이렇게 엉망인 것은 마오에 대한 우상화가 덜 됐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엉망인 길이 참을 만 했다.

도착하자 국부의 생가답게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특히 관광버스들이 많았다. 완만한 언덕길로 올라가자 왼쪽에 연못이 나오고 오른쪽 언덕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생가가 보였다. 마오가 공부보다 일을 하라는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투신을 하겠다고 겁을 주어 아버지의 항복을 얻어냈다는 연못이다. 뒷날 마오는 “대가 끊기기를 원치 않는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해 승리했다”며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계급투쟁에 승리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빚 투성이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마오가 집에서 운영하는 쌀가게의 도제가 되어 돈을 벌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오는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수업료마저 안 주겠다고 하자 서당에 가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까지 해야 했다. 다행히 어머니?그의 편이었다. 어머니와 외가의 설득으로 그는 사범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거기서 좌파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면 우리가 아는 마오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참 역사란 묘한 것이다. 생가는 당시의 중국 농촌기준으로는 상당히 부유한 수준의 꽤 큰 집이었다. 방이 여섯 개 달린 기와집이니 부농이었던 셈이다. 사실 펑더화이(彭德懷) 등 일부를 제외하면 마오, 덩샤오핑(鄧小平),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혁명 지도자들도 대부분 부농이나 중산층 출신이다.

징강산과 좌파 수호지?

창사에서 징강산으로 향하자 첩첩산중에 들어섰다. 80년 전 추수봉기에 실패하고 마오가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남은 6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징강산으로 향하던 그 길이다. 감회가 무량했다. 그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징강산은 해발 900m 정도 되는 넓은 지역에 펼쳐진 평평한 산이다.

그러나 후난과 장시성의 경계에 위치해 국민당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따라서 이미 이 지역에는 500명의 화적 떼가 자리잡고 주민들에게 소작료와 세금을 받으며 사실상의 정부로 행세하고 있었다. 마오는 이들을 찾아가 자신들이 남부로 가기 위해 잠시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들과 공존하기로 했다. 이후 지역 토호들을 공격해 처형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장악하고 이들을 부하로 두게 된다.

보기에 따라, 그가 자주 읽었던 수호지의 의적과 비슷한 모습이 된 것이다. 즉 현대판 송강 비슷해졌다. 신문은 그를 중요한 화적두목으로 보도했다. 그 때문에 마오는 모스크바와 중앙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주더(朱德)의 부대가 합류하면서 전설적인 ‘주-마오 군대’군대가 탄생했다.

흔히 중국에는 다섯 성지가 있다고 하는데 첫번째는 마오의 시신과 혁명박물관이 있는 베이징(北京)이다. 두 번째는 마오의 생가인 창사, 세 번째가 바로 징강산이다. 그리고 네 번째가 마오가 장정 중 권력을 잡게 되는 준이(遵義)이고, 마지막으로 장정을 끝내고 홍군의 수도가 된 옌안(延安)이다. 징강산은 5대 성지중의 하나답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고급 리조트와 숙소들이 즐비해 마치 한국의 고급 리조트타운에 온 기분이었다. 수백억원을 들여 외양만 번지르르하게 만들어 놓아 그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광주 5.18기념묘역처럼 혁명유적의 정신은 사라지고 제도화돼 있다는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상당히 많은 계단을 지나자 뾰쪽한 금빛 조각들이 난창과 창사에서 본 소총 조형물처럼 하늘을 향해 찌르고 있는 모양의 징강산 혁명열사기념비가 나타났다. 징강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왼쪽에는 창을 든 어린 손자와 함께 아마도 산으로 들어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깊은 주름의 할머니의 모습의 조각이, 오른쪽에는 홍군과 그를 그리는 아내의 모습을 한 조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깊은 주름의 할머니는 발 밑의 호화스러운 리조트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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