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의 전격 퇴진이 여권 내 권력 핵심들 간 갈등을 가라앉힐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분간은 잠잠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론 불씨가 내연할 것으로 보인다.
박 비서관의 사퇴는 일단 이상득 의원 측과 정두언 의원 등 소장파 간 권력투쟁 양상으로까지 비화했던 주류 핵심들 간의 충돌을 급속히 진화하는 분위기다.
박 비서관을 ‘권력 사유화’의 핵심 인물로 지목하며 공격했던 정 의원은 박 비서관의 사퇴 이후 추가 공세를 자제했다. 정 의원은 언론과의 접촉도 삼가고 있다. 그의 한 측근은 10일 “이제 더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 의원의 문제 제기에 공감했던 소장파의 기류도 비슷하다. 청와대가 문제 인식을 충분히 받아들인 만큼 이젠 조용히 기다릴 때라는 분위기다. 서울의 한 의원은 “박 비서관의 사퇴는 대통령이 나름대로 조치를 한 것”이라며 “이 마당에 새로운 이슈가 증폭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의원 측도 신중하긴 마찬가지다. 애초 박 비서관이 사퇴한 것 자체가 내홍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읍참마속’ 성격이 있었다. 때문에 소장파 측을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
이 의원 한 측근은 “특별히 무슨 말을 하겠나”라고 기류를 전했다. 양측이 자제함으로써 주류 간 갈등 양상이 한숨 잦아드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 안팎에서도 “박 비서관의 사퇴로 여권 내 알력은 마무리하고 새 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그러나 기대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좀 더 내밀하게 본다면 갈등이 진화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만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오히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양측의 갈등이 더 심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
4ㆍ9총선 당시 정 의원 등 소장파 55명이 이 의원의 공천 반납을 주장하며 충돌했던 것에 이어 이번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양측의 골을 한층 깊게 패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 안팎에서는 “정 의원과 박 비서관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이는 곧 충돌의 불씨가 여전히 내연할 것이라는 전망과 연결된다. 당장 인적쇄신의 내용이 소장파들의 주장에 미치지 못한다면 내홍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권력 내 무슨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양측이 사사건건 의견 충돌을 빚을 가능성도 크다.
주류 측 한 핵심 의원은 “당분간은 소강 상태가 되겠지만 갈등 요소는 잠재돼 있다고 봐야 한다”며 “새 정부 뒷받침을 위해 서로 역량을 모아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참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 역대 청와대 실세와 박영준
누군가 "권력은 칼날 위의 꿀과 같다"고 말했다. 자기절제를 잃거나 파워게임에 밀리면 권력은 언제든 자신을 베는 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다. 역대 청와대의 실세들의 역정이 이를 증명한다.
김현철씨는 아버지(YS)가 대통령으로 있던 문민정부에서 '소통령'으로 불리며 군림했다. 공식직함도 없이 고위직 인사는 물론 신한국당 공천을 한 손에 주물렀고 비선라인을 통해 안기부의 정보보고도 받았다. 그러나 집권 마지막 해(1997년) 검찰의 한보 수사로 현직 대통령 아들이 처음으로 구속되는 신세가 됐다.
국민의 정부 시절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부장관 등을 거치며 대통령(DJ)의 최측근, 심지어 '대(代)통령'으로까지 불렸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공격을 받았으나, 누구도 실명을 거론하며 말하기 어려웠던 실세였다.
그런 그도 2001년 11월 소장파 의원들의 정풍운동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청와대 비서실장에 재기용돼 임기 마지막까지 DJ 곁을 지켰으나 노무현 정부 때 대북송금 특검에 의해 구속되는 비운을 겪었다.
참여정부 초기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이광재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을 15년간 보좌한 오른팔이었다. 집권 초 그의 위세는 "집권 4년차의 박지원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불과 8개월 만에 그도 물러나야 했다.
당시 여당 실세였던 천정배 의원이 "정보와 권력을 독점했다"며 사퇴를 요구한 것이 결정타였다. 이후 측근비리 특검 수사 등으로 칩거했던 그는 17대 의원에 당선되며 재기에 성공했다.
9일 사표를 제출한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도 '왕(王) 비서관'으로 불리며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정권의 핵심으로 통했다는 점에선 역대 실세들과 닮은 구석이 많다. 직급은 비서관이지만 청와대 내에선 '수석비서관과 비서실장 중간쯤'이란 말이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박 비서관 파워의 상당 부분은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실세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권력 사유화'의 핵심인물로 지목당했지만 사실은 실세의 뜻을 이행하는 대리인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일각에선 그가 지시사항 이상을 챙기고 개입하면서 화를 자초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녹용 기자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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