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빨라져 오고, 평균 수명은 길어지고. 은퇴 준비는 이제 퇴직을 눈앞에 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 ‘인생의 애프터 설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을 감당하기만도 벅찬 일, 애프터는 뒷전으로 미뤄지기 일쑤다.
은퇴 후에는 전원에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꾸고 있는 40대 초반의 한 부부를 소개한다. 그들의 꿈은 그다지 거창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 또한 대단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미래를 설계했다. 퍼즐을 맞추듯 그 꿈의 조각들을 하나 둘 맞춰가고 있다.
■ 결혼 15년, 3년 전 105㎡ 아파트 장만
결혼 15년 된 이민국(43), 고순화(42)씨는 평범한 부부다. 2,000만원짜리 전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 한푼 두푼 아끼며 성실히 살아온, 우리네 이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들이다.
‘애프터를 준비하는 아름다운 인생’이란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부부는 “남들처럼 살아왔고, 당연하게 노후를 준비하고 있는 것뿐”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손사래 치는 그들을 “요즘은 평범하게, 보통으로 사는 것도 정말 힘든 세상”이라며 겨우 붙들어 자리를 마련했다.
첫 직장인 롯데월드에서 지금껏 근무해온 이씨, 20년 가까이 하급 공직 생활을 해온 고씨가 꿈꿔온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워낙 꽃과 풀, 나무를 좋아하는 그들이라 노후 계획은 자연스럽게 전원생활로 귀착됐다.
맞벌이라지만 월급쟁이가 그렇듯 큰 돈이 쉽게 모이진 않았다. 아끼고 또 아껴서 3년 전 경기 고양시 능곡의 시가 3억원이 조금 넘는 105㎡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부부의 경제원칙 첫번째는 사치, 낭비하지 않기. 여행을 좋아하지만 한번도 부부가 해외여행을 나간 적이 없다. 신혼여행과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딱 2번 제주도에 갔을 뿐이다. 자동차도 신차 구입은 절대 금물. 17년 전 30만원에 산 다 찌그러진 엑셀 중고를 7년을 더 타다가 20만원에 되팔았고, 지금 차는 이씨의 형이 5년을 타다가 물려준 것을 5년째 더 타고 있다. “새 차를 타는 기쁨도 크겠지만 사는 순간부터 감가상각되는 차에 헛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끼지는 않는다. 이씨는 “가족 대소사 등에는 선뜻 돈을 내놓으며 사람 도리는 한다”고 했다. 부부는 다달이 들어오는 수입의 30%는 저축을 하고, 보너스 등 목돈이 생기면 MMF 등 은행 상품을 통해 꿈을 위한 종잣돈을 모았다.
■ ‘노후 설계’를 위한 최대의 힘은 부부애
전원생활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경매다. 도시인이 지역에 크게 제한받지 않고 경작지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6개월 코스의 경매 특강도 들었고, 수년간 경제지를 탐독해오고 있다.
고씨는 요즘 사진에 푹 빠졌다. 주말에 부부가 함께 할 시간이 생기면 카메라를 들고 훌쩍 ‘출사’를 떠난다. 전에는 아내가 사진을 찍는 동안 인근 저수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던 남편도 이제는 망원경을 들고 ‘포인트’를 찾아주는 적극적인 동반자가 됐다. “아끼면서 살지만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그들은 “인생에는 그 시기를 놓치면 못하는 것들이 있다. 노후 준비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을 다 포기하고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이런 부부애가 노후를 함께 꿈꿀 수 있는 최대의 원동력이다. 이씨는 “믿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한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고씨가 말을 막지 않는 것을 보니 진짜인가보다. “상대방이 싫어할 것 같은 이야기는 웬만하면 안하고 살았고, 집이 지저분하면 내가 먼저 치우지 아내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는게 이씨의 말이다.
이들은 몇 해 전 이씨가 퇴직금 중간정산 받은 돈과 그동안 모은 종잣돈을 더해 경매로 충북 충주에 1,850㎡의 땅을 갖게 됐다. 드디어 전원생활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땅만 있다고 전원생활이 되는 건 아니다. 작은 땅이라도 농사 지을 방법을 알아야 했고, 은퇴 후 벅차게 닥쳐올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필요했다.
■ 은퇴까지 15년, 전원생활 준비
부부가 현 직장에서 은퇴하기까지는 아직 15년 가량 남았다. 부부는 이 시간을 꿈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삼고 있다. 전원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을 익히고 배우는 시간이다. 부부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처가 식구와 함께 밭을 빌려 농사도 지어봤고, 어른들로부터 꾸준히 농사 경험도 전해 듣고 있다.
전원생활에 대한 계획은 남편보다는 아내가 좀 더 구체적이다. 고씨는 사진 외에도 천연 염색, 서각 등 취미 생활에 보다 집중할 계획이다. 지금도 주말엔 딸 영주(14)와 인사동 등을 거닐며 뭐 좀 배울 게 없을까 찾아 다닌다.
남편 이씨?“전원에 살림을 차리면 아침 일찍 일어나 산에 올라가 운동하고, 아침을 먹은 후에는 밭을 가꾸고 아내의 취미생활을 돕고 살겠다”는 정도다. 고씨는 “노후에는 돈 만큼이나, 남는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편도 앞으로 더 좋은 자신만의 취미를 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충주에 사놓은 땅이 좋기는 하지만 “너무 외지다”는 주위의 지적에 부부는 고민이다. 나이 들어서는 병원도 가까워야 하고 마을의 이웃과도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양주나 용인, 양평 등 서울과 가까운 곳으로 터전을 잡아보고 싶은데 이미 그곳 땅값은 오를만큼 올랐다. 하지만 낙천적인 부부에게 포기는 없다. “노력한 만큼 되겠죠. 종잣돈 계속 모으고 발품 부지런히 팔다보면 그 노력 만큼 보상이 따라오겠죠.”
부부는 무리한 투자는 삼갔다. 대출을 통한 투자는 생각도 안해봤고 주식도 손대지 않았다. “주식은 한번에 10배로 오를 수도 있지만 또 반대로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 “욕심 부리지 않으면 행복할 것”
한국사람 만큼 자식에 모든 걸 희생하는 부모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올인’은 노후 계획을 엉망으로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자식에게 쓰는 돈 절반을 자신의 노후를 위해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과거엔 평균수명도 짧고 자식도 많아 ‘자식 보험’에 의지해 살면 됐지만, 이제는 오직 자신이 준비한 ‘자기 보험’으로 지탱해야 하는 시대다.
중학교 1학년인 하나 뿐인 딸은 부모의 계획을 적극 지지한다. 고씨가 일 때문에 “늦게 들어간다. 못챙겨서 미안하다”고 하면 되레 “다 챙겨먹고 다닐 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위로해주는 의젓한 딸이다.
이씨 부부는 남들처럼 자식을 변호사, 의사 만들겠다고 모든 걸 쏟아붓지 않는다. 최근 딸이 학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자 학원을 그만두게 하기도 했다. 딸이 어려을 적 “나중에 커서 1층에는 내가 좋아하는 제과점을 열고, 2층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야기했을 때 부부는 “네가 그렇게 살고 싶다면 스스로 기반을 다져야 한다. 부모에 기대서 살 생각 말아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자립심을 키워주겠다는 생각에서다. 고씨는 “남편이 처음에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책임지겠다고 하더니 이젠 결혼할 때까지로 많이 연장됐다”며 웃었다.
은퇴 후 소득원은 이들이 좀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연금만 가지고 살 수는 없는 일. 고씨는 좋은 아이템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열어볼까 생각중이다.
“농사 짓고 살다보면 큰 돈은 필요 없을 거예요. 욕심 부리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어요. 시장에 가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걸 사 먹을 정도면 되지 않겠어요?” 부부의 얼굴에선 즐거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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