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 권모(68)씨는 8년 전 은퇴를 결심하면서 2남 1녀의 자녀들과 3층짜리 한 집에서 모두 함께 사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막상 은퇴 후 자녀들과 잦은 트러블을 겪자 부부가 단 둘이 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장남이 말을 잘 듣는 효자였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성격이 변했는지 며느리 말만 듣고 곧잘 큰소리를 냈다”며 “차라리 다 내보내고 남은 생은 아내와 잘 살아보자는 생각에 거실에 걸어뒀던 가족사진도 치워버렸다”고 말했다.
사회적 단절을 경험하는 은퇴자들은 가족에게 의존하는 심리가 전보다 더 커지지만, 가족은 이런 은퇴자를 선뜻 이해하고 받아주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가족에게 실망한 은퇴자들은 극단적인 고립감에 시달리며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며 “가족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을 버리고 작은 일에 상처받고 움츠러들기보다 스스로 내면의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 손자손녀에게 애정을
은퇴자들은 제일 먼저 소원했던 자녀와의 관계 회복을 꿈꾼다. 하지만 성인이 된 자녀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은퇴설계 전문 컨설팅업체인 DBM코리아 유홍렬 이사는 “대부분의 은퇴자들이 자녀에게 가족여행이나 식사모임을 제안했다가 몇번 거절당하고 나면 충격을 받고 아예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며 “자녀의 어린 시절만 생각해서 친밀감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자녀와의 갈등을 단시일 내 풀려고 하기보다 마음의 문을 열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자녀보다 손자손녀에게 관심을 쏟으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주거지를 근거리로 옮겨 손자손녀의 유치원 재롱잔치나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하면 가족간 대화의 소재가 끊기지 않고, 자녀뿐 아니라 며느리 사위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 은퇴증후군 앓는 아내에게 심리적 보상을
은퇴자들은 자신만 사회적 단절감과 소외감을 겪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배우자는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사회적 지위를 잃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곽 교수는 “전업주부 아내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은퇴증후군을 함께 겪는다”며 “남편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상대방의 결점이 더 크게 보이는 등 잠재된 부부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난 10년간 65세 이상 부부의 ‘황혼 이혼’ 비율이 5배 이상 증가한 것도 묵은 부부 갈등과 관련이 깊다. 자녀와 달리 부부 갈등은 덮어두고 기다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전기보 행복한은퇴연구소 소장은 “아내의 은퇴증후군을 인정하고, 재산 분할이나 가사 분담 등에 구체적으로 합의해 심리적 보상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은퇴 후에는 부부가 무조건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기보다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해 서로의 성격을 정확히 진단한 후 활동시간을 조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 다시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은퇴자들 대부분이 취미나 봉사활동을 통해 제2의 사회인맥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새로운 대인관계에서 사회 부적응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은퇴자들의 비영리단체 재취업을 돕는 희망제작소 해피시니어 남경아 팀장은 “비영리단체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막연한 봉사의식만으로 참여하면 실망감이 더 클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은퇴자들이 영리와 효율성을 목적으로 하는 엄격한 조직에서 30년 넘게 일해왔기 때문에 나이나 직급을 막론하고 의사를 개진하는 수평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유로운 옷차림, 호칭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 팀장은 “은퇴 후의 사회활동은 제2의 취업을 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신입사원 같은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행복한 은퇴를 위한 체크 리스트
-은퇴 후 부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인지 합의한다.
-부부가 함께 하고 싶은 일의 목록과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알아본다.
-가계부 정리 등 아내와 가사 분담을 상의하고 부부의 결정을 따른다.
-아내를 위해 세대주 변경 등 심리적인 보상 방안을 마련해준다.
-자녀와 형제자매 중 누구와 더 자주 만날 것인지 고려해 주거지를 결정한다.
-손자 손녀와의 만남은 정례화하고, 함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한다.
-은퇴 전 사회관계를 이어나가?위해 조찬모임이나 세미나 등에 지속적으로 참석한다.
-평생을 함께 할 친구를 떠올리고 취미나 여행 등 일과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자료 : 행복한은퇴연구소 제공
이현정기자 agada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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