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 촛불정치를 칭송하는 지식인과 언론의 수사가 눈부시다. 어느 사회학자는 이 봄, 우리 사회가 새로운 정치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며 “촛불정치는 민주주의의 진화를 상징한다”고 규정했다. 이를 통해 진정한 민주공화국 시대로 나아가는 듯하다는 진단까지 덧붙였다.
평소 높이 본 젊은 법학자는 “주인의식으로 충만한 대중의 직접 행동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국민이 대표자를 감시, 통제하는 핵심장치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촛불시위는 유례없는 대중의 직접행동 양식으로 세계에 수출할 만한 ‘정치 한류’라고 찬양했다. 공영방송을 비롯한 언론의 칭송은 이에 미치지 못하니 굳이 되짚지 않는다.
민주주의 ‘진화’ 아닌 ‘퇴보’
정부의 쇠고기 수입협상은 경솔하고 무모한 실책이다. 국민 정서와 ‘광우병 불안’을 헤아리지 못한 채 촛불시위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안이하고 무능하게 대처한 잘못은 더욱 크다. 그러나 이념 지향과 관계없이 우리사회 주류에 속하는 학자와 언론이 촛불시위를 마냥 칭송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촛불시위에 동참한 수십만 시민의 순수한 열정을 낮춰봐서가 아니다. 법질서가 국민의 정당한 저항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여겨서도 아니다. 대의 민주정치가 근간인 헌정 질서에서 국민이 선출한 정부와 국회 등의 제도정치가 올바로 작동하지 않은 나머지 국민이 직접 광장과 거리에 몰려나온 상황을 ‘민주주의의 진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이번 사태를 우리 민주주의의 퇴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싶다. 그래야 제도정치의 중심에서 국민의 다양한 요구에 호응하고 이해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기는커녕, 이기적 권력다툼과 생존투쟁에 몰두해 국민을 배신한 정치세력의 행태를 엄히 문책할 수 있다. 또 대의 민주정치를 떠받치는 건전한 공적토론과 여론형성을 주도하는 양 행세하면서 이념과 정파적 대치에 매달린 언론과 지식인들의 몰이성적 위선을 통렬하게 꾸짖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세력과 언론, 지식인들이 앞 다퉈 촛불시위, 촛불정치를 찬양하는 데는 이런 사리를 흐리려는 얄팍한 계산이 숨어있다. 대세 흐름을 좇아 말과 표정을 바꾸는 영악한 처세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첫 머리에 거론한 학자들을 이런 무리와 나란히 세우는 것은 언뜻 부당하다. 두 사람 모두 학문적 진지함이 돋보이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들의 촛불정치 찬양이 더욱 못마땅하다.
대의 민주정치가 선거를 통한 국민 동의와 다수결 원칙 등의 형식과 절차에 얽매여 위기를 맞았다는 경고는 오래됐다. 고전적 참여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이상인 ‘능동적 시민’의 자기통치(self-government) 이념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공적 활동의 중심으로 복귀하고, 직접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추세다. 그러나 국가가 시민사회를 대체할 수 없듯 시민사회가 국가를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도정치의 축인 정당이 촛불정치에 편승하고, 주류 언론이 인터넷 여론 난장 등 대안 매체의 활약을 부각시키는 것은 그래서 어색하다.
낡은 정치행태 개혁이 선결과제
수구 논리라고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올바른 대의 민주정치를 해보지도 못한 채 대통령과 제도정치의 과오와 실패를 빌미로 곧장 대중의 생활정치, 참여정치 시대 개막을 선언하는 것은 성급한 느낌이다. 현실의 명백한 모순을 바로잡을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대중 또는 ‘다중’(多衆)의 자발적ㆍ자율적 저항운동에서 민주정치의 미래를 찾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국민 신뢰를 잃은 제도정치의 정당성이 숫제 부정되는 혼돈이 되풀이 될 것을 우려한다.
촛불시위는 국민의 주권의식, 민주주의 인식을 낡은 정치의 틀이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제도정치의 중심과 주변을 넘나든 이들이 놀라운 역동적 변화를 그저 찬양하는 것은 염치없고 어리석다. 모호한 개념의 미래 정치를 논하기에 앞서 힘겹더라도 기성정치의 틀과 행태부터 개혁해야 한다.
강병태 수석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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