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액자 안에는 ‘COMMON SENSE’(상식)라고 돋을새김된 기다란 야구 배트가 들어있고, 액자 겉면에는 ‘유사시 유리를 깨뜨리시오’(BREAK GLASS IN CASE OF EMERGENCY)라는 안내문이 씌어져 있다.
흡사 건물 곳곳에 설치된 방재도구와 같다. 많은 사람의 상식 체계 안에서 야구 배트는 야구할 때 사용하는 운동 도구이지만, 이 작가의 상식에서 그것은 누군가를 위해할 수 있는 흉기이거나 외부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비상 호신도구다. 그렇게 상식은 뒤집힌다.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를 해체하며 현대 소비사회의 불안과 폐해를 꼬집어온 잭슨 홍(37)의 세 번째 개인전 ‘현실세계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이 5일 서울 청담동 네이처포엠 빌딩 갤러리2에서 시작됐다.
서울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삼성자동차의 상업디자이너로 이력을 시작한 그는 여러 회사를 옮겨다니며 작가로 변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직장에서 해고되면서 2005년 홍승표라는 본명 대신 잭슨 홍이라는 이름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일상의 제품들을 기이하게 뒤틀며 현대 디자인이 유발하는 소비사회의 환상을 폭로하는 실험적 작업들이 그의 장기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응급상황’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며 독특한 정서를 자아낸다. 작가는 현실세계를 위험사회로 인식하는 듯, 야구배트, 도끼, 숟가락, 변기 등 일상의 다양한 물건들을 채집, 변용해 유리 상자 안에 봉인했고, 현실적 사용가치로부터 유리된 이 물건들은 익숙한 낯섦으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저의 상식과 사회의 상식이 충돌하는 경험이 많았어요. 심리적 불안이 구체적 일상과 부딪히면서 어떻게 물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가에 관심이 많죠.”
지난 한 해 독일 슈트트가르트에 레지던시 작가로 가 있으면서 만든 사진 작품 ‘체어도’를 보자. 검은 옷을 입은 흑인 무술가가 흰 옷의 백인 침입자에 맞서는데, 그의 손에 들린 무기는 의자다.
“이 의자는 시중에서 구입한 일상적인 접이식 의자예요. 하지만 유사시에는 이렇게 흉기와 방패로 바뀌죠. 사용자에 의해 그 의미와 용도가 전용되는 겁니다.”
어린 시절 즐겨 보던 싸구려 무술 교본처럼 각각의 동작들을 사진으로 촬영해 매뉴얼처럼 배열한 이 작품은 태권도와 절권도의 이름을 모방해 ‘체어도(의자도)’라고 명명했다. 사진 속 모델들은 레지던시 작가로 함께 독일에 머물던 앙골랑 스웨덴의 작가들.
신체와 직접적으로 촉각을 나눈다는 점에서 의자는 그에게 특별한 주의를 끄는 소재다. 불안할 때면 의자를 발로 밀어 당기는 버릇이 있는 그에게 의자는 의수, 의족과 같은 신체의 보철. 이 점에 착안해 작가는 톱날이 부착돼 의자를 움직일 때마다 그 동력으로 의자 다리가 잘라지는 아주 특별한 의자를 고안했다. 불안을 해소해 주는 일명 ‘톱의자’다.
“손톱을 씹고 머리카락을 뽑는 일종의 자해를 통해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의자 다리를 잘라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빅터 파파넥의 저서 <현실 세계를 위한 디자인> 은 디자인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만 관심을 기울였죠. 저는 디자인이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뭔가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능적이라는 것에 대해 다원적으로 열려져 있을 수 있도록 저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죠. 디자인은 순수미술에 비해 일상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현실>
전시는 다음달 5일까지. (02) 3448-2112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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