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성진 前 법무부 장관
정성진(68) 전 법무부 장관은 한국일보 '평생독자'다. 장명수 한국일보 고문이 사장으로 취임하던 해(1999년) 가입했으니 햇수로 10년이 됐다. 여동생(현재 일본 거주)이 장 고문의 이화여고ㆍ이화여대 1년 후배인 관계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장 고문의 권유가 있긴 했지만 "좌우 이념에 편향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고 담백한 맛이 좋아 애독하고 있다"고 했다.
정 전 장관의 한국일보 사랑은 창간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법대 58학번인 그에게 한국일보는 시대의 청량제로 다가왔다.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던 학생 시절, 새로운 기풍을 내걸고 출발한 신생지 한국일보는 참신하고도 감각적이었다"고 회고한 그는 특히 문화면의 과감한 기획물과 연재소설에 탐닉했다.
고인이 된 작가 홍성유의 연재소설 <비극은 없다> , 원로 극작가 한운사의 <대야망> , 황석영의 연재소설 <장길산> 은 척박하기 그지없던 '문화 불모'의 땅에 뿌려진 시원한 빗줄기나 다름없었다. "당시 한국일보 연재물은 문화적일 뿐 아니라 지적이기도 했다. 김성우 고문의 <세계의 문학기행> 이나 최정호 교수의 해외공연 소개 코너 등은 목마른 지성들에게 그야말로 '놀라운 신세계'였다." 세계의> 장길산> 대야망> 비극은>
정 전 장관은 애독에 그치지 않고 지면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검찰청 중수1과장으로 재직하던 80년대 초반, 주간 기획물로 나갔던 <아버지의 일기> 라는 코너에 법조계 대표로서 고정 필진으로 등장한 것이다. 아버지의>
"지방 임지에 혼자 떨어져 있다 집에 올라왔는데도 아이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의 섭섭함, 공무를 한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사는 미안함 등을 담담하게 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다면 정 전 장관은 한국일보의 옛 영화만을 기억하는 '나이 지긋한 독자'에 불과한 것일까. 그는 강한 부정으로 답했다. "지금도 한국일보를 읽는 것은 어느 쪽이라고 강요하지 않고, 중립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는다는거죠. 신문을 읽고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보는 한국일보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어요."
_한국일보를 읽으시면서 특히 좋아하는 코너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장명수 칼럼은 영원한 애독자고요.(웃음)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강준만 교수의 독특한 시각과 외신 분야에서는 나름대로의 시각을 가진 강병태 칼럼을 주로 읽습니다. 시인과 소설가들이 쓰는 '길 위의 이야기'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요."
_한국일보의 강점을 꼽아주시죠.
"일상 생활의 소박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문화기획이나 특별한 시각을 강요하지 않는 칼럼과 논설이 여전히 강점이라고 봅니다."
_칼럼과 문화기획만으로 좋은 신문이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정체성과 전통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정치면만 강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신문이 갖지 못한 독특한 지면 만들기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봐요. 최근 유력 신문을 만든 2명의 국내외 신문사 CEO 전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들의 마키아벨리적인 권력이 신문을 키운 동인으로 소개돼 있더군요. 그러나 그런 방향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회의도 적지 않습니다."
_한국일보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과거의 과감하고 신선했던 신문제작 풍토가 아쉽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다소 위축된 데는 경영 압박도 요인이 됐을 법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신문이 다소 궁핍해 보이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죠."
김영삼 정부 시절 대검 중수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난 정 전 장관은 법조계에서 손꼽히는 학구파 법조인이다. 참여정부 들어 부패방지위원장과 마지막 법무부 장관으로 컴백하기 전까지 국민대 교수와 총장을 지냈다. 평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하는 그는 "인터넷이나 방송의 위력이 크지만 종이신문은 다른 매체가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이 있다"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 차별적인 신문을 만든다면 독자들이 외면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 이기우 재능대 학장
‘행정의 달인’, 지금은 일선 교육행정가로 변신해 재능대를 이끌고 있는 이기우(60) 학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거쳐 지난해 3월 옛 교육인적자원부 차관을 끝으로 40년 공직생활에서 물러난 그와 함께 일해본 경험이 있는 부하나 상사는 이렇게 불렀다. 뛰어난 업무 추진력과 상사든, 부하 직원이든 특유의 친화력으로 ‘감동’시키는 그의 스타일은 지금도 공직사회에 회자된다.
그는 “한국일보를 사랑한다”는 말로 운을 뗐다. “나 처럼 한국일보를 오랫동안 보아왔고, 지면 구석구석을 꼼꼼히 읽는 독자도 드물 것”이라고도 했다. 영락없는 ‘한국일보 마니아’다.
오전 5시에 눈을 뜨는 그는 배달된 한국일보를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1면부터 사설까지 전체 제목과 부제를 살피고, 눈길이 가는 이슈를 중심으로 통독하고 있다. 이 학장은 “하루 평균 1시간은 신문을 읽는 데 할애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학장과 한국일보와의 인연은 30년 전인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방교육청에서 교육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한 그는 지인의 권유로 한국일보 구독을 시작했다. 객관적인 보도에 끌려 사무실에서도 한국일보를 봤지만, 가정 구독은 그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 학장은 “집에서는 신문을 정독(精讀)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다”며 “마음에 드는 칼럼이나 관심이 가는 기사는 따로 오려놓고 틈날 때 마다 읽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신문 기사와 칼럼에 푹 빠졌던 경험이 공직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미문(美文)과 격언이 될 만한 구절은 몽땅 외우는 버릇도 한국일보를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그의 기억력은 정평이 나 있다. 이 학장은 “신문 기사나 칼럼 중 도움이 될 만한 구절은 메모해 외웠던 습관이 기억력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그의 기억력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옛 교육부 총무과장 시절인 90년대 중반, 300명에 가까운 직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모두 기억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당시 그와 함께 근무했던 교육과학기술부 한 서기관은 “말단 직원의 이름과 나이까지 일일이 꿰고 있는 이 학장의 기억력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한국일보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지면을 평가해달라고 하자 “신문은 철저히 중개자가 돼야 한다는 게 평소 소신”이라고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독자가 올바르게 판단할 콘텐츠를 얼마나 많이 제공했는가가 신문의 성패라고 전제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한국일보는 제 역할을 다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자극적인 특종이나 침소봉대하는 내용의 글을 지면에 실어 국민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기사가 적은 것도 독자들에게 신뢰를 줬습니다.”
그러면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신문이 특화돼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한국일보 만의 색깔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제 목소리를 낼 때는 반드시 내야겠지요.”
그는 재능대 학장에 취임한 뒤 자신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성실함과 추진력, 순발력을 무기로 학교를 확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학교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부분을 바로잡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택한 결과다.
올해에는 자체 정원조정을 통해 정원 160명의 호텔외식조리과를 신설했고, 100억원이 들어가는 조리동 건설도 앞두고 있다. 대학 재정 확충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추진하는 학교기업의 첫 단추다. 이 학장은 “조리동이 완공되면 외식분야를 특화시켜 송도신도시와 서울 지역 외식산업에 본격 진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김진각기자 김정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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