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가수 조성모의 히트곡 ‘아시나요’의 뮤직 비디오를 둘러싸고 작은 파문이 일었던 적이 있다. 당시 뮤직 비디오는 파월(派越) 장병과 베트남 여성의 러브 스토리를 소재로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용인즉, 월남전에 파병된 국군 소대장과 베트남 여성이 전쟁터에서 애절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주인공이 이끌던 소대가 베트콩에 의해 전멸 당하면서 둘의 사랑은 홀로 남겨진 여인의 가슴 속에 묻히고 마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었다.
월남 참전자들의 서러운 분노
뮤직 비디오가 출시되자, 이미 백전노장이 된 월남 참전 용사들이 비디오 제작사를 찾아가 허위사실 유포(?)를 공식 사과할 것과 해당 비디오를 전면 폐기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유인즉, 뮤직 비디오에 한국군 일개 소대가 전멸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항의의 첫 번째 내용이었고, 다음은 뮤직 비디오 주인공이 착용했던 군모(軍帽)의 표식이 소속 부대를 명확히 드러낸 만큼 이는 해당 부대 참전군인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것이 두 번째 요지였다.
허구임에 분명한 뮤직 비디오 내용에 딴지를 걸며 격렬히 항의했던 참전용사들의 행동을 두고 당시 언론은 지나치게 과도한 반응이라는 시선을 보냈고, 오래도록 장롱 속에 묻어 두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입고 비디오 제작사로 몰려간 예전 장병들을 향한 여론 또한 그다지 고운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파월장병들의 과격한 선택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불끈 쥔 주먹을 높이 치켜든 순간 단순히 뮤직 비디오의 허구적 스토리를 향해 무작정 분노를 표출했던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다 바쳐 싸웠건만, 월남전 참전의 의미에 대한 정당한 평가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의분, 설상가상으로 파월장병은 ‘용병’으로 보아 무리가 없으리라는 주장이 공공연히 오가는 현실을 향한 통탄, 더불어 고엽제 피해자를 위시하여 피해에 대한 보상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자신들의 자취가 역사 속으로 묻혀 버린 데 대한 박탈감 등이 한 데 어울려 엉뚱한 대상을 향해 분출했던 건 아닐는지.
그러고 보니 역시 몇 해 전 보훈학회에 참석했던 전문가들 사이에 주고받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한 참석자의 전언(傳言)인즉, 서울대가 개교 50주년을 기념하여 6ㆍ25 전쟁 당시 사망한 재학생들을 찾아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는데, 시작부터 예기치 못한 장애에 부딪쳤다 했다.
실제로 학적 자체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재학생 신분의 전사자를 찾아내어 확인하는 작업의 고됨은 ‘극히 어려웠다’는 말만으론 전달이 안 되는 과정이었지만, 마침내 작업을 마치고 보니 ‘더 이상 미루지 않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했다.
한국 현대사가 모두 담긴 6월
와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어른이 한 분 계시다고 했다. 어느 날 한 할머님께서 명예 졸업장을 준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학교를 찾아오셨는데, 그 분 손엔 꼬깃꼬깃 접힌 아들의 재학 시절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했다. 남들 다 가는 장가 한 번 못간 채 구천을 떠돌 아들의 서러운 죽음을 50여 년 가까이 가슴 속에 묻고 살았을 어머님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당신이 건네 주시던 빛 바랜 성적표를 받아들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6월 6일 현충일을 필두로 6ㆍ15와 6ㆍ25를 거쳐 6ㆍ29를 지나는 동안 우리 모두는 한국 현대사가 얼마나 숨 가쁘게 전개되어 왔는지 새삼 가슴이 뻐근해올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소중한 목숨을 바친 이들의 삶 하나하나가 충분히 그 의미를 인정 받고 있는지, 더불어 공정히 평가 받고 있는지, 혹 여기에도 소외되고 박대 받는 이들은 없는지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으면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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