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수(66) 고문. 그는 한국일보가 키워낸 대기자다. 한국신문사상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매일 칼럼을 쓰기 시작한 칼럼니스트(84년), 최초의 여성 주필(98년), 최초의 여성 사장(99년) 등 당시 여성에게는 파격적인 중책을 맡기며 한국일보는 그를 키워왔다.
1963년 한국일보 공채 16기로 입사한 장 고문과 이제 막 기자 생활을 시작한 강지원, 김혜경, 진실희, 차예지 기자 등 견습 67기 여기자 4명이 만나 한국일보와 기자정신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왜 기자가 되셨나요.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서울 수복을 하던 해에 이화여중에 입학했는데 입학식에서 ‘거울’이라는 학교신문을 나눠주었어요.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읽을거리를 주기 위해 그 당시엔‘거울’을 주간으로 발간했는데 ‘거울’을 읽고 학생기자를 하면서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택할 때는 이 일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옳지 않은 일에 함께 분노하고,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5년동안 기자로 일하며 세상을 바꾸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부끄럽지만, 신문기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직업이라는 신념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여성향한 편견 깼던 百想… 입사하자마자 큰 깨달음 얻어
-견습기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편견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충격적으로 깨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한국일보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출입기자는 여기자(지금 소비자 보호운동을 하는 정광모선배)였고,기자들 중에는 왜소증 장애를 가진 선배가 있었어요. 그 선배가 코리아타임스 필기시험에 합격하여 면접을 할 때 신문사 간부들은 활동적이어야 하는 기자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했지만, 당시 장기영 사주는 ‘그 사람 자신이 기자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당신들이 반대하느냐’고 설득하여 합격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선배는 문화부장 부국장 등을 거치며 정년퇴직 할 때까지 열심히 일했어요. 한국일보는 벌써 50여년전에 여성에 대한 편견,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버렸던 것이지요. 입사하자마자 얻은 그 깨달음이 한평생 기자로 일하는데 기둥이 되었어요. 기자의 가장 큰 적은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오늘의 우리 상황에서 기자는 편견과 이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40년전 여기자 출입처 창경원… 차별 있다고 포기해서는 안돼
-40여년 전 여기자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그 때 여기자의 출입처는 창경원 정도였어요.‘곰이 새끼를 낳았다’, ‘올 봄엔 벚꽃이 일찍 피었다’ 등의 기사가 나오는 창경원에는 1년차에서 10년차에 이르는 여기자들이 모여있었지요. 여기자들은 문화부나 생활부 이외의 부서로 가기 어려웠고, 승진에서도 차별을 받아서 동기나 후배를 상사로 모시고 일하는 게 보통이었어요. 저도 동기가 부장일 때 차장으로 일했고, 후배 몇 명이 편집국장이 되는 동안 계속 부국장이었고, 끝내 편집국장은 못해봤어요. 차별을 극복하는 길은 화난다고 사표를 내는 대신 버티는 수 밖에 없어요.(웃음) 오죽하면 여기자 클럽에서 세미나를 한 후 ‘버티기 선언’을 하자는 농담이 나왔겠어요.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직업을 차별에 화가 나서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저도 끝내 버텼기 때문에 나중에 주필도 되고 사장도 될 수 있었지요. 지금은 전반적으로 일하는 여자들의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유리지붕이 완강하죠. 여자들이 유리지붕을 깨고 올라가려면 실력과 함께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리적인 안정을 유지하지 않고는 장거리 경주를 할 수 없어요.”
-여기자의 강점은 뭘까요.
“우리가 차별 받는 존재라는 것이 강점입니다. 오랜 세월 사회의 주류였던 남자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강점이지요. 차별과 억압의 문제, 소외의 문제 등을 우리는 더 잘 이해하고 더 큰 개혁의지와 분노를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자를 차별하는 문화 속에서 조심성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겠지요. 제가 어렸을 때는 “여자가 아침에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가정교육을 받았는데, 제가 부장으로 일하는 동안 아침에 부원들에게 큰소리로 야단치지 않으려고 조심한 것은 그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런 노력은 여자들 자신을 위해서도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어떤 조직에서든 여자가 30% 이상은 돼야 변화가 가능하다고 하신 적이 있지요.
“어느 분야에서든 ㈋봉?그 정도는 돼야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일보는 1980년대 초에 가장 먼저 일본군 위안부를 기획 기사로 다루면서 그 문제를 부각시켰는데, 당시 남성 중심의 편집국에서는 정신대가 ‘우리 민족의 수치’라는 이유로 그 기획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가정폭력도 ‘가정의 문제’를 신문에 대서특필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인식이 강했지요. 직장 내 성희롱 등을 사회문제로 끌어낸 것은 많은 조직에서 여성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언론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여성 비율이 높아져야 우리 사회의 양식이 탄탄해 집니다”
-70~80년대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기자로 45년 일하는 동안 절반 이상의 세월을 군사정부 아래 보냈으니 참 불행한 기자였다고생각합니다. 문화부 기자였는데도 기사를 쓰면서 정보부에 붙들려가지 않을까 겁이 날 때가 많았고, 운동권 성향의 문인들 글을 실리면 문공부에서 곧장 경고를 하는 상황이었어요. 뒤돌아 보고 싶지 않은 암울한 세월이었어요. 그 시절에는 언론의 자유만 있으면 얼마든지 좋은 신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군사정부가 물러난 후 막상 언론의 자유를 누리게 되자 자유야 말로 훈련과 공부 없이 누릴 수 없는 것이란 점을 깨닫게 되었어요. 오늘 언론이 선정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정도를 잃는 경우가 많은 것은 억압의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한국의 언론은 좀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군정 억압시대 '문학기행' 기획… 열정 넘쳤던 지면들 기억 생생
-그 시절에 문화부장으로 '문학기행'이라는 좋은 기획을 하셨고, 그 당시의 독자들은 "암울했던 시절에 신문을 읽는 유일한 낙이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 기획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기획을 이끌었던 김훈, 박래부 기자의 열정과 탁월한 능력이 가장 큰 성공요인이었지요. 그리고 그 당시 신문이 8면이었는데, 파격적으로 1면을 문학기사에 내주었던 한국일보 편집국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시리즈는 몇 번 쉬면서 5~6년이나 이어졌는데, 항상 숨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작업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남아있는 것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숨막히는 시대였고, 치열하게 문학을 이야기함으로써 구원받고자 했던 작업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시리즈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은 우리들의 열망이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시대 기자들, 특히 한국일보 기자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과거에 언론과 기자들이 누리고 가진 것 중에는 거품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거품이 더 빠지면서 기자라는 직업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론을 지키고 발전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이 신문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지만 수준이 높은 인쇄 매체에 대한 요구는 날로 높아질 것입니다. 인터넷에 흘러 넘치는 정보 속에서 바른 판단과 견해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한국일보의 경우 기자들이 신문사의 성향에 구애 받지 않고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일보를 지배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중도의 길은 양비론이나 양시론에 숨지 않고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지요. 빈부격차와 함께 이념의 양극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우리의 현실에서 한국일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일보 강점은 '불편부당' 양극화 현실서 기자역할 중요
-아직도 기자란 직업이 좋으신가요.
“이렇게 오래 일을 하고도 열정이 식지 않는 직업이 얼마나 될까요. 나는 아직도 사건 현장에서 뛰고 있는 후배들이 부럽고 뜨거운 뉴스에는 설레임을 느낍니다. ”
-정계로부터 자주 러브 콜을 받는데 계속 거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징검다리 삼지 않듯이 자기가 좋아하는 직업을 징검다리 삼아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에서의 경험을 살려 다른 직업으로 옮기는 것을 나쁘게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문기자란 다른 어떤 직업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계획이 있나요.
“내가 쓴 글이 인쇄될 가치가 없다고 느껴질 때,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런 느낌이 들 때 칼럼 쓰는 일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정리=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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