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오후 1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영덕여고 이난주(47ㆍ국어 담당) 교사가 학교 인근 야탑동의 한 상가로 들어섰다. 1층 복도를 척척 걸어가더니 건물 한쪽 ‘큰사랑 시각장애인 선교회’ 팻말이 걸린 문을 열고 들어갔다.
16.5㎡(5평) 남짓한 방에서 함께 열심히 책을 읽던 초등학생 5명과 여고생 5명 등 학생 10명이 모두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반겼다. 초등생 동생들은 큰사랑교회에 다니는 시각장애인 신자의 자녀들이고, 여고생 누나ㆍ언니는 이 교사가 이끄는 교내 자원봉사활동 동아리 JLS(Joy & Love Serviceㆍ기쁨과 사랑의 봉사) 소속 학생들이다.
이 교사는 3년 전부터 제자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이곳에서 ‘즐거운 공부방’을 열어 시각장애인 자녀들의 학습을 돌봐주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위주로 읽기, 쓰기, 산수 등을 가르치는데, 부모의 장애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뒤처졌던 아이들의 실력이 몰라보게 향상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한글을 몰랐던 초등학교 2학년 진웅(가명ㆍ9)군은 “선생님과 누나들의 도움으로 한글을 깨친 뒤부터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말했다.
이 교사와 제자들이 ‘큰사랑교회’에서 하는 일은 이 뿐만이 아니다. 이날 오후에는 아이들의 부모님들을 위해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뭘 하는 거냐”고 묻자, 이 교사는 “워드입력 자원봉사”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이 불편한 점자 대신 음성으로 책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입력된 내용이 음성으로 재생되는 기능을 갖춘 특수컴퓨터에 따뜻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옮겨 적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육열 높은 분당에서도 실력 있는 국어 선생님으로 통하던 이 교사가 봉사활동에 뛰어든 것은 2001년부터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했던 어려운 이웃을 이제부터는 돌봐야 한다’는 평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경희대 NGO대학원 자원봉사관리학과에 입학해 봉사의 이론을 배운 뒤, 영덕여고 최초의 ‘봉사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학교 근처 이웃부터 돕기 시작했다.
처음 봉사를 시작한 곳은 야탑동 성은학교였다. 정신지체 청소년을 위한 특수학교인 성은학교 학생들이 박물관 견학 등 현장수업을 나갈 때마다 이 교사와 JLS 학생들이 함께 나와 이들을 도왔다. 또 영덕여고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모은 돈으로 밑반찬 거리를 장만해 매월 한 번씩 야탑동 A임대아파트의 독거 노인 20여명에게 전달한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이 교사의 봉사활동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입시 준비에 바쁜 고교생을 데리고 다니며 봉사활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애들이나 잘 가르치라’는 등 일부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이웃 만큼이나, 학생들도 자원봉사를 통해 크게 성장하면서 반대했던 학부모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JLS를 거쳐간 선배들이 심성도 바르고,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에 잇따라 합격하면서 JLS는 입회 경쟁률이 8대 1에 달할 정도로 영덕여고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가 됐다. 이 교사는 “고3은 봉사활동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 매년 실제 활동하는 30명 회원은 1학년과 2학년 각각 15명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봉사활동에 매달린 탓일까. 이 교사는 아직 미혼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생활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느 날 수업을 하기 위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학생들이 제게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는 눈빛을 보낸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교사 자리에서 물러나 남을 도우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사는 올해 여름방학에는 JLS 학생들과 함께 해외 자원봉사를 계획하고 있다. 그동안의 봉사활동이 학교 인근에만 그친 반면, 이제부터는 비록 짧은 방학을 이용해서라도 도움이 더 절실한 외국의 이웃을 돌보겠다는 것이다.
이태무 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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