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소녀들의 배후가 여러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 연예인이라고도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좌파 불순세력이라고도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전교조 교사들이라고도 말한다. 갑작스럽게 자신들의 뒤를 캐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해진 몇몇 소녀들은 “우리의 배후는 미친 소”라고, “그럼 광우병 걸린 소들은 다 좌파냐”고 되묻고 있지만, 어른들은 계속 CSI수사관처럼 확대경을 들이대고 있다.
청계광장의 무정형 다면체들
얌전히 공부하고 학원 가야 할 소녀들이 광화문에 제비 떼처럼 앉아 있는 광경 자체가, 그들에겐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풍경 자체가 불편했던 것이다(이런 ‘나쁜’ 소녀들을 보았나!). 해서, 지금부터 내가 그 ‘나쁜’ 소녀들의 배후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줄 테니, 괜스레 엄한 곳에 가서 이단 옆차기들 하지 마시고, 잘 받아 적기 바란다.
소녀들의 배후를 캐기 위해선, 우선 ‘소녀’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그것이 배후를 캐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이다. 작금의 ‘소녀’들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일분에 100타 정도의 빠르기로 전송하고(가히 빛보다 빠른 엄지손가락이다), 이제 막 데뷔한 신인가수를 자신이 먼저 찜했다고 우기고, 교복치마를 배꼽 위로 치켜올려 입고 다니며, 닌텐도와 교육방송 문제풀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이 친구들은, 과연 우리가 이전부터 알고 있던 바로 그 ‘소녀’들이 맞는 것일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들을 어느 한 단어로 정의 내린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떤 불가능의 상태, 무정형의 상태, 그것이 그녀들에 대한 가장 합당한 정의일 것이다. 한데 문제는, 끈질기게 배후를 캐고자 노력하는 어른들은 그런 소녀들을 오직 단 한 가지로만, 고정된 단일면체로만, 정의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배후’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탄생한 것이다.
질 들뢰즈가 말했고, 소설가 이승우 선생이 어느 책에선가 다시 한 번 설명했듯, 본디 사물은 본래적인 성격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뜻이 결정된다고 한다. 즉 ‘입술’은 마이크와 배치될 땐 ‘말하는 기계’가 되고, 음식과 배치될 땐 ‘먹는 기계’가 되며, 침실과 배치될 땐 ‘섹스 하는 기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소녀’들의 뒤에 ‘배후’를 배치한다면, 그때 그녀들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명명백백하게 그것은 ‘비독립적 인격체’로 변모하게 된다. ‘소녀’들은 사라지고, 스스로 의식할 수도 없고, 스스로 판단할 수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목각인형과 같은 존재.
눈이 있다면 청계광장에 나가서 똑똑히 봐라. 소녀들의 뒤에 누가 있는지. 소녀들의 뒤엔 소녀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소녀들의 뒤엔 맥도날드에서 불고기버거를 사 먹는 또 다른 소녀의 친구들이 있다. 그것이 그녀들의 합당한 ‘배치’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계관이 다른 새 감각과 반응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본능적인 ‘감각’이자 ‘반응’이다. 그런 소녀들에게 ‘배후’란 단어를 배치한다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이다. 자신들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그녀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뭐냐, ‘배후’가 없단 말이냐? 화를 내는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럴 땐 조용히 백지 위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써 보자. 그리고 그 앞뒤로 각자의 자녀 이름을 한 명씩 ‘배치’해 보자.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는 자, 당신이 바로 미스터리 소녀들의 배후이다.
이기호 소설가ㆍ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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