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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패션 아이콘' 이브 생 로랑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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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패션 아이콘' 이브 생 로랑 타계

입력
2008.06.0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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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패션계의 거장이자 대표적인 20세기 패션 아이콘인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 생 로랑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지병을 앓아 온 것으로 전해졌다.

생 로랑은 남성 예복인 턱시도를 여성복에 적용한 ‘르 스모킹 슈트(suit)’를 발표해 여성용 바지 정장을 대중화하는 등 세계 패션계에 혁명적인 업적을 남긴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 코코 샤넬과 더불어 프랑스를 세계 패션 명가로 이끈 버팀목으로 꼽힌다.

여성 턱시도 외에 수렵복을 일상복으로 재현한 사파리 재킷과 치맛단이 사다리꼴을 이루는 트라페즈 드레스 등을 유행시킨 생 로랑은 20세기의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생 로랑은 1936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크리스티앙 디오르에 입사하면서 패션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디오르가 사망한 57년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오르면서 프랑스 패션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그는 평소 디오르를 스승으로 칭하며 “나에게 예술의 기초를 가르쳤다”고 회상하곤 했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 보였던 그의 인생에도 좌절은 있었다. 알제리 전쟁으로 군에 징집된 그는 병으로 3주 만에 제대, 파리로 돌아왔지만 디오르 의상실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생 로랑은 62년 동성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인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자신만의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브랜드 이브 생 로랑(YSL)을 창립, 그의 패션 혁명을 본격화하게 된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아이템을 여성복으로 옮겨 왔으며 기성복과 향수 등을 선보인 리브 고슈(Rive Gauche) 브랜드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생 로랑은 다양한 ‘최초’의 기록을 보유한 디자이너기도 하다. 83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살아있는 패션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줬으며 흑인 모델을 최초로 무대에 세웠다.

70년대만 해도 유럽 사람들에게 생소한 시장이던 한국과 일본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영화 의상에도 관심을 가져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영화 <세브린느> (1967) 등의 의상을 담당했다. 드뇌브는 생 로랑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그는 2002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마지막으로 패션계에서 공식 은퇴했다. 동료 디자이너 크리스찬 라크루와는 “이브 생 로랑은 샤넬의 형식과 디오르의 화려함과 풍부함, 스키아파렐리의 재치를 모두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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