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습관이 하나 있다. 어떤 사회현상을 분석할 때 머리가 복잡하면 긴 호흡을 가지고 역사를 참고하는 버릇이다. 요즈음 촛불시위와 이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공안적 대응을 바라보면서 다시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세계화와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현 시대에 두 개의 신화가 있다. 시장과 민주주의의 신화이다. 우선 국가의 규제는 악이고 시장은 선이라는 신화인데, 역사는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시장이 가져다 준 것은 1920년대의 대공황과 파시즘이었고 이 같은 시장의 실패로부터 세계를 구한 것은 뉴딜이라는 국가의 개입이었다.
DJㆍ노무현 때도 마찬가지
시장과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었다는 것도 신화이다.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이 보통 선거권인데 자유주의자들은 이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못 사는 사람으로 이들에게도 투표권을 주면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즉 시장과 자유주의의 역사는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억압하는 역사였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연계시켜 노동자들도 체제 내에 통합시키는 포드주의, 그리고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고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케인스주의가 자리잡으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자본주의경제가 위기에 처하고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자리를 잡으면서 다시 시장과 민주주의 간의 긴장이 시작됐다. 인권보다는 시장과 효율이 강조되면서 그동안 어렵게 쟁취한 민주적 권리들이 후퇴했다. 특히 신자유주의에 의해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자 사회적 갈등이 심해졌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공안논리가 우세해졌다.
우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면의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2007년 3월 10일)’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권변호사 출신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들의 신자유주의정책으로부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 농민들의 저항을 누르기 위해 공권력을 무차별하게 사용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의 속성을 주기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인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한 발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공안국가’로 나가는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소통을 이야기하면서도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쇠고기 수입 고시를 강행하는 한편 연행과 물대포라는 물리력으로 ‘소통’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적인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가 인권침해를 경고하고 나섰고 한나라당까지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야당 선거유세로부터 대운하 반대 교수, 촛불시위 참가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찰도 되살아나고 있다. 나아가 공기업 개혁을 위한 여론 조성을 위해 공안기관들이 공기업에 대해 표적 사정을 벌이고 있고 임기가 보장된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의 수장들까지 갈아치우려고 무리수를 두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공안논리에다가 “수단을 가리지 말고 결과만 낳으면 그만이며 시키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라는 ‘CEO 권위주의’까지 더해져 위험수위로 달려가고 있다. 계속되는 촛불시위에 대한 이 대통령의 반응이 기껏 촛불은 누구의 돈으로 샀는지 파악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니 할 말이 없다.
더 심한 이명박 정부가 문제
정작 걱정은 지금부터이다. 세계경제의 어려움,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안고 있는 내재적인 한계를 생각할 때 이 대통령이 자신들을 찍은 다수 국민들이 바라는 민생 해결을 이룰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따라서 추락한 인기의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공권력과 공안기관이다. 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공안국가의 늪에 더 이상 빠져들기 않기 위해서는 이 대통령이 귀를 열고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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