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를 촬영하는 도중에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포옹하고 가볍게 키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여자 배우가 “나, 키스하는 장면을 못 찍겠어요”라면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고 퀴즈를 내면, 어떤 대답들이 나올까?
이 기사를 다 읽은 다음에 네티즌 가운데 누군가가 블로그에 올려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한번 물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런 일이 설마 있을라고-라는 의견도 많을 텐데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글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1960년대 우리나라 TV방송의 실상을 조금 소개 하고자 한다. 50년대 후반에 RCA-TV(HLKZ)가 개국이 되어 방송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채널을 그대로 인수 받아서 개국 한 TV가 현재 채널 9번으로 방영되고 있는 KBS 1-TV이다.
이어서 MBC-TV가 개국하고, 65년에 삼성 그룹이 자본금을 내서 완전한 민영방송인 동양TV(TBC-TV)가 채널 7번으로 방영을 시작했다. 이때 방송 총 책임자는 이병철 회장의 사위이고, 미국에서 신문 방송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규(현 제일기획 상임고문 겸 서강대 명예교수)씨이다.
TBC는 개국과 동시에 파격적인 경영으로 일취월장하더니 기존 TV의 시청률을 능가하면서 민영방송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쇼 프로그램, 드라마, 교양 등 아주 다양하게 편성 제작을 했는데, 위에서 말한 키스 신 거부 사건(?)은 68년 3월 31일에 일어났다.
동양방송은 개국한지 3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크게 인상적인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로 하고 그 일환으로 대하 드라마를 기획했다. 그것이 “조선총독부”이다.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간인 45분짜리 연속극이며, 출연자들도 톱 클라스들이었다. 남자들로는 김성옥 김성원 오승룡 강계식씨 등이고, 여자 연기자는 안은숙과 홍세미씨 등이다.
남자 연기자들은 전부 연극무대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으면서 TV에 출연을 하고 있었고, 여자 연기자 가운데 안은숙은 드라마 탤런트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홍세미는 영화배우로 이제 막 데뷔한 신인 연기자였다. 안은숙과 홍세미는 “조선총독부”의 주연 배우이고 특히 홍세미는 주인공이다.
이날 녹화는 연속극 24회분이다. 남자 주인공 박충권 역은 김성옥이 맡고, 여자 주인공 윤정덕 역은 홍세미가 맡았다. 두 남녀가 헤어지는 내용을 찍는 것으로서 서로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워 나무 뒤에서 포옹하고 가볍게 키스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서너번의 연습을 마치고 막상 슈팅에 들어가려고 할 때 홍세미씨가 “나, 못 하겠어요. 아버지한테 여쭤 보고 올래요” 하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홍세미는 그 때 나이가 22살로 출중한 미인이었다. 세기상사라는 영화사가 신인배우 모집을 할 때 무려 1,725명이나 응모를 했고 그 중에서 뽑혔으니 대단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홍세미의 본명은 도홍숙인데 이름의 가운데 글자인 “홍”을 살리고, “세기상사가 낳은 미녀”라는 뜻으로 홍세미라고 예명을 지었다.
또 그 속에는 “세기의 미녀”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도 했다. 그녀는 68년에 데뷔 작품인 “춘향”에서 신성일과 함께 출연했고 포옹은 물론 사랑하는 장면을 촬영 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TV 드라마에선 키스 신을 못 하겠다고 돌아선 것이다. 무슨 사연이 이었을까? 안방극장이라서 거북했을까?
어쨌거나 이 문제로 난처해진 것은 방송국이고 그 보다 더 황당한 사람은 당사자인 남자배우 김성옥이었다. 그 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분했다. 연기자에게는 무슨 일이고 일어 날 수 있지만 이건 너무 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김성옥은 고려대(사학과) 재학시절부터 연극을 했고 그 당시 10여년의 경력을 갖고 있는 34살의 중견 연기자였다. 그런 그가 상대 여배우로부터 포옹 장면을 거절당했으니 분을 사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홍세미 입장에서는 상대배우 김성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로 “아버지께 여쭤 보고” 결정하려고 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김성옥으로서 자존심을 상했을 것이다.
포옹장면이 달갑지 않았으면 리허설할 때 거절할 것이지 막상 녹화가 들어가는 순간 그런 일이 생겼으니까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 그렇다면 방송국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했을까. 아버지한테 여쭤보고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그 장면을 없애 버려야할까. 즉시 스탭들과 간부회의를 열었다.
긴 시간 회의를 한 끝에 결론은 그 드라마에서 홍세미를 출연정지 시키기로 했다. 주인공, 특히 여자 주인공이 출연을 못하니까 당연히 “조선총독부”의 스토리가 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홍세미가 맡았던 윤정덕이 3ㆍ1운동 때 맞은 총상이 급격히 악화되어 죽는 것으로 부랴부랴 연속극의 방향을 바꿔서 수습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키스 신을 거절한 에피소드는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뒷맛이 씁쓸했던 일이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생각하면 지금의 잣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60년대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보수적이었던 우리나라 연예계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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