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29일 일본 규슈(九州) 북동부의 오이타(大分)시.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도로변에 늘어서 박수를 치는 가운데 바퀴가 세 개 달린 경주용 휠체어를 탄 선수들이 도로의 출발선을 빼곡이 채우고 있었다.
보스턴, 센콘(스위스) 대회와 더불어 세계 3대 국제대회로 꼽히는 '오이타 휠체어 마라톤 대회' 여성 하프마라톤 부문에 출전한 장애인 선수들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휠체어 마라톤 선수 이유미(27)씨도 이를 악물고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탕!'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선수들은 양팔로 힘껏 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21㎞ 구간 내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쉼 없이 팔을 움직여 바퀴를 굴려야 하는 하프마라톤. 겨우 7개월 전 휠체어 마라톤을 시작한 이씨에겐 힘겨운 도전이었다.
10㎞ 쯤 지나니 호흡이 가빠지면서 점점 지쳐오기 시작했다. 이씨가 몹시 힘들어 하자, 같은 그룹에서 달리던 외국 선수들이 격려해 주며 완주를 독려했다. 이씨의 휠체어를 뒤에서 밀어주는 선수도 있었다. 한국에서 열리는 장애인 스포츠 대회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시민들의 열띤 응원과 격려도 큰 자극이 됐다.
다시 힘을 얻은 이씨는 점차 앞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 순식간에 선두 그룹에 합류했다. 마지막 스퍼트 끝에 결승점에 골인한 이씨의 등수는 2위. 자신도 믿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게 마라톤이구나', 깨달았다.
열 살 때 두 다리 잃어
이씨가 두 다리를 잃은 것은 열 살 때. 아버지의 사료 공장에서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다 대형 분쇄기에 양 다리가 빨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어린 나이에 두 다리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고 1년 동안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직 '절망'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모를 만큼 나이가 어렸던 데다 워낙 밝고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그 당시는 잘 넘겼지만 사춘기를 평상심으로 맞기는 쉽지 않았다. "남들처럼 치마도 입고 예쁘게 꾸미고 다니고 싶었어요."
허나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사춘기 소녀의 가슴에는 상처만 켜켜이 쌓여갔다. 더욱이 17세 때 외환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일반 학교에서 삼육재활학교로 옮겨야 했다. "왜 내게만 이런 힘든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걸까, 많이 힘들어 했었죠."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삼육재활학교에서 '장애인 체육'이라는 걸 처음 접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됐다. 두 다리가 없는 자신도 공을 던지고, 차고, 운동기구와 씨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고 황홀했다.
1999년 농구부터 시작해 축구, 테니스, 역도 등 다양한 장애인 스포츠를 경험했다. 2002년 시작한 휠체어 펜싱팀에서는 천생연분도 만났다. 지금도 펜싱을 하고 있는 남편은 올해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할 예정이다.
삼성카드 후원으로 대회 출전
장애인들이 스포츠를 즐기기는 쉽지 않다.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선수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게 없다. 공적인 지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반 스포츠의 경우 비인기 종목도 실업팀이 존재하고 선수들은 월급을 받으며 운동을 하지만, 장애인 스포츠는 실업팀이 없어 월급을 받는 것은 생각조차 못한다. 더욱이 대회 참가 경비부터 장비 유지비, 훈련비 등 모든 비용을 장애인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선수들도 경제적 부담 탓에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운동을 포기하는 장애인 선수들을 볼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저도 경제적 부담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운동만 하고 싶었어요."
지난해 3월 육상을 시작하면서 이씨의 소망은 이뤄졌다. 삼성카드가 이씨 소속팀인 서울시립 북부장애인복지관 휠체어 마라톤팀을 후원, 장애인 운동선수에게 가장 절실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삼성카드는 국제대회 참가 비용과 장비 유지비(타이어 교체, 유니폼) 등 매년 3,000만~4,0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대회 전 집중 훈련 기간이나 대회 당일에는 삼성카드 '휠체어 마라톤 봉사팀' 소속 직원들이 선수의 수족처럼 움직이며 자원봉사를 한다.
휠체어 육상을 하는 여자 선수가 국내에 한 명도 없다 보니 육상을 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뒤에는 경제적 부담이 해결돼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오이타 대회에서 2위, 올해 4월 열린 서울국제 휠체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여성 하프마라톤 부문)하는 등 잇따라 좋은 성적을 거뒀다.
"기업의 나눔 활동 덕분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선진국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한 게 우리 현실입니다. 좀더 많은 기업들이 장애인 체육에 관심을 갖고 실업윳?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중국이나 일본에는 장애인 체육 실업팀이 여럿 있거든요."
장애인 체육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흔히 장애인 체육을 '재활 목적'으로 여기는데, 꼭 그렇지는 않아요. 장애인 선수도 엄연히 승부욕이 있는 스포츠맨이거든요. 장애인 체육도 일반인 경기처럼 재미있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운동으로 여겨줬으면 좋겠어요."
남편과 올림픽 동반 출전이 꿈
그는 올해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에 남편과 나란히 출전하는 꿈을 꿔왔다. 최근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가 이씨의 국제경기 출전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을 금세 접고 올해 전국체전과 오이타 대회에서 풀 코스에 도전하기 위해 매일 맹연습을 하고 있다. 버스와 자동차가 쉼 없이 지나가는 의정부 장애인복지관 옆 왕복 2차선 도로에서 조금씩 훈련 거리를 늘려가며 가장 좋은 자세와 주법을 연구 중이다.
오이타 대회 풀 코스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다른 국제대회에도 계속 출전하다 보면, 4년 후 열리는 '런던 장애인 올림픽'에 남편과 함께 출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여러 가지 운동을 해 왔지만, 육상이 제 마지막 운동이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에는 여자 선수가 거의 없으니까 세계 최고 선수가 되는 걸 목표로 할래요. 우리 사회가 장애인 체육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갖는다면 제 꿈도 한층 앞당겨질 수 있을 거에요."
■ 삼성카드 365 봉사단, 척박한 장애인체육 분야 후원 앞장
삼성카드는 1995년 카드업계 최초로 사회공헌을 전담하는 봉사단을 만들었다. 2004년부터는 전 임직원이 '삼성카드 365 봉사단'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다.
억지로 하는 봉사가 아닌 자발적 봉사를 유도하기 위해 회사 차원에서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2004년부터 봉사활동을 업무 시간으로 인정하면서 지난해에만 연인원 1만8,000여명이 총 4만4,000시간 동안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지역별, 부서별 또는 개인 특기에 맞는 114개의 다양한 자원봉사팀이 구성돼 있어 자기에게 맞는 봉사팀을 고를 수 있는 것도 특징이다.
'테디베어(곰인형) 봉사단'은 소(小)근육 강화를 위해 계속 몸을 놀려야 하는 여성 지체장애인들을 위해 곰 인형 만들기 실습을 함께 한다. 이를 통해 장애인들의 운동 재활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만들어진 곰 인형을 다시 백혈병 소아암 어린이들에게 기증해 봉사의 기쁨을 더하고 있다.
'수화 봉사팀'은 청각장애 아동을 위해 수화를 통한 학습 및 야외활동을 지원한다. 과외 및 강사 경험이 있는 임직원들은 '마니천사 봉사팀'을 구성해 장기 입원 중인 백혈병ㆍ소아암 어린이들의 일일 교사가 돼준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게 '휠체어 마라톤 봉사팀'이다. 국내 장애인 체육의 척박한 현실을 안타까워 한 임직원들이 뜻을 모아 2005년 봉사팀을 만들었고, 이후 국내 최초의 장애인 휠체어 마라톤 팀인 '북부장애인복지관 휠체어 마라톤팀'을 후원해 왔다.
이들은 1대 1 훈련 트레이너, 스포츠 마사지, 국내 및 국제대회 출전 지원 등 장애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 동반자 지원활동에 나서는 한편, 회사에 어려운 현실을 호소해 경제적 지원도 이끌어 냈다.
삼성카드는 휠체어 마라톤팀의 장비 구입비, 국내ㆍ외 대회 참가비 및 경비를 지원함은 물론, 2005년부터 매년 서울국제 휠체어 마라톤 대회를 후원하고 있다. 지난해엔 삼성카드 임직원 등 약 2,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장애 휠체어 체험 행사도 가졌다.
최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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