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차가 완파된 대형사고였습니다. 남편은 그날 아침 일찍 충북 음성으로 출장을 떠났습니다. 오전 10시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도착할 시간이 멀었는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더군요. 로봇엔지니어로 평소 출장이 잦은 남편이기에 신혼 초부터 늘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해서 남편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놀랄까 봐 중간에 전화를 하지않는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여보세요?" "나 교통사고 났어!(어쨌든 남편 목소리라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7중 추돌사고야." "살아서 전화하는데 뭘….""차가 완전히 사망했어. 폐차래." "사람만 안 죽으면 돼."
남편이 앰뷸런스로 집에 실려왔습니다. 종아리 근육 손상, 요추에 경미한 충격, 약간의 가슴 통증…. 그런데 제가 보기에 가장 큰 손상은 에어백이 터지며 순간 마찰로 볼이 데인 자국이었습니다. "얼굴의 연지가 가장 치명상이야. 인물 베(버)렸네." "웃기지마, 가슴뼈 아파." '참 황당한 여편네'라고 생각했는지 앰뷸런스 기사가 한마디 합니다. "아주머니. 자칫하면 과부 되실 뻔했어요. 기적이라니까요."
남편은 당일 큰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다음 날 동네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하룻밤 자고 난 남편은 온몸이 퉁퉁 부어 있더군요. 아무튼 시간이 가면 흔적 없이 낫는다니, 조상님들께 백배 절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결혼 21년 째, 한달 20여 일을 해외로, 국내로 동분서주 해온 남편입니다. 타고난 건강체와 정신력으로 입원 한번 한 적 없는 사람이었죠.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가 있겠습니까. 맞벌이 17년에 두 달 전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야 남편의 흰머리가 보통 이상 임을 새삼 알았습니다. 유난히 동안이었던 대학 4학년 미소년이 순간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있더군요. "엄마야, 웬 중늙은이…." "당신은? 거울보고 하는 얘기야?"
몇 달 전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남편 차가 과열돼 엔진을 교체해야 됐어요. '1년 6개월 밖에 안 된 차라 당연히 A/S가 되겠지'했지요. 서비스 대상이 3년 6만km이니까요. 그런데 남편 차는 겨우 18개월에 8만 km였습니다. 고스란히 자비 530만원을 들여야 했지요. "대체 무슨 일을 하세요? 영업사원도 이 정도는 아닌데." 자동차 영업소 직원이 혀를 내두르는 걸 보고 '아, 남편의 청춘이 그 좁은 차 속에서 다 흘러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입원시키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번 기회에 푹 쉬어. 하늘도 당신 쉬라고 도와준 건가 봐." "내 일은 내가 안 하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미뤄질 뿐이야." 취나물 비빔밥을 해오겠다고 병실을 나서면서 저는 애써 도도하고 이지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 흉내를 냈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 해."
경기 고양시 주엽동 백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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