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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女心 사로잡는… 샴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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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女心 사로잡는… 샴페인

입력
2008.05.2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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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은 공주로 분한 오드리 헵번의 전성기를 볼 수 있는 영화다. 외교 일정 때문에 로마에 머물게 된 공주가 둥지를 탈출, 일반 시민 행세를 하며 생애 최고의 하루를 보낸다는 이야기. 탈출한 공주가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은 헤어스타일 바꾸기. 공주 풍으로 치렁치렁 늘이고 있던 머리카락을 아무 미용실에 들어가 싹둑 잘라버린다.

남자 중학생처럼 깡총해진 머리는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을 더욱 부각시켜 당대의 ‘잇 스타일’이 되었다는 후문. 길에서 아이스크림 핥아 먹기, 노천카페에 앉아보기, 선상의 심야 댄스파티 참가하기 등 공주의 일탈은 이어진다.

“샴페인 플리즈!”

로마의 미용사에게 머리를 새단장하고, 스페인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그녀는 꿈에 그리던 노천카페에 앉아 본다. 예쁘장한 소년 같은 외모의 아가씨가 공주님일 줄은 꿈에도 모르는 주변의 시민들. 하지만 그녀가 카페의 웨이터에게 주문을 하는 순간 사람들은 흠칫 놀라게 된다. 이 대목에서 햅번의 대사는 바로 “Champagne please.”(샴페인 주세요)

자, 샴페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볼까? 샴페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프랑스의 샴페인 지방에서 생산하는 발포성 와인으로, 지역적으로나 양적으로 생산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과실 알코올 가운데 톡 쏘는 기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샴페인이라 명한 제품들이 있지만, 따져보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프랑스의 샴페인 지방 산이 아니라면, 통상 ‘발포성 와인’ 혹은 ‘발포성 과실주’라 불러야 옳다.

그런 까닭으로 샴페인=호사품이라는 묘한 공식도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일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샴페인을 전 세계가 나눠 마셔야 하기 때문에 그 가격대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 물론, 샴페인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유가 희소성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로마 한가운데서 머뭇거림 없이 샴페인이라는 고급 수입 음료를 주문하는 아가씨는, 아무리 평범한 옷을 입고 있어도 주변 사람들이 놀랄만한 신분이라는 암시다(게다가 흑백 영화인 ‘로마의 휴일’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만들어졌으니, 당시 실정으로 샴페인이 얼마나 더 귀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당대 최고가의 음료로 꼽히는 샴페인은 전 세계 여인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로마의 휴일 뿐 아니라 영화사의 획을 긋는 영화의 명장면마다 여배우들은 대게 샴페인 잔을 들고 있다. 좁다란 잔을 타고 황금빛 기포가 솟아오르는 샴페인은, 술이라기보다 금팔찌나 보석반지와 같이 여인들을 빛내주는 최고의 액세서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프랑스의 장금이, 마담 퐁사르당

샴페인이 국적 불문하고 세계인들의, 특히 소위 말하는 로열 패밀리들의 필수 아이템이 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남편이 이끌던 샴페인 제조업을 잇게 된 여인, 마담 퐁사르당(Ponsardin)의 야망에서 시작된다.

요즘같이 여권이 신장한 세상에도 여자가 수장 노릇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하물며 200년 전이었으니 샴페인 회사의 운영을 덜컥 맡게 된 젊은 부인의 상황은 오죽했을까 싶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의 국내 정세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각설, 불안정한 국내 정세를 실감한 여사장은 즉각 수출로 눈을 돌린다. 시작은 러시아. 러시아의 왕족들, 귀족들을 시장으로 삼고 그야말로 ‘VVIP’ 마케팅을 시작한 것. 1850년 전후로는 러시아 상류층의 식탁 위에 마담 퐁사르당이 수출한 샴페인이 빠지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뵈브 끌리꿔’(Veuve Clicquot)라는 그녀의 브랜드를 러시안들은 ‘끌리코프스코에’(Klikofskoe)라 부르며 아꼈다. 푸시킨과 같은 문인들은 마담 퐁사르당의 샴페인을 예찬하는 소품을 쓰기도 했다.

마담 퐁사르당은 러시아에 이어 잉글랜드, 중국 등 안 가는 곳 없이 샴페인을 수출하게 되었는데, 여사장의 ‘절대 미각’도 큰 이유가 되었다. 그녀의 미각에 대한 자신감이 단맛을 선호하는 러시아인들, 드라이하고 쌉쌀한 술을 요구하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입맛을 정확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200년 전의 과학으로는 당도나 산도를 수치로 측정할 수 없었지만, 마담 퐁사르당의 입맛은 훗날 과학자들이 놀랐을 정도로 정확했다고 한다.

샴페인과 어울리는 음식

샴페인은 몇 종류로 나뉜다. 비교적 단맛인 ‘드미 섹’(demi-sec), 일반적으로 드라이한 맛 ‘브뤼’(brut), 특별히 좋은 해를 기려 만드는 ‘리져브’(reserve), 청포도로만 만들어 산도가 높은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 그리고 붉은 포도의 함량을 높이거나 레드 와인을 섞어 만들어 맛이 풍부한 ‘로제’(rose) 등이다.

위도가 높은 편인 샴페인 지방의 포도는 당도가 넘치지 않고, 비교적 깔끔한 맛을 내기 때문에 단맛을 원한다면 반드시 ‘드미 섹’을 찾아야 한다. ‘드미 섹’은 식후에 제격琯? 꿀을 찍은 한과나 졸여 만드는 생강정과 등의 디저트와 잘 어울린다.

결코 가볍지 않은 맛의 ‘로제’ 샴페인은 훈제 오리나 닭 요리, 로스트 비프 등과 그 맛이 맞는다. 과일 식초와 약간의 콩기름, 설탕과 소금 후추를 갈아 넣은 드레싱에 쌈채를 버무려 접시에 담자. 거기에 버섯을 볶아 올리고 훈제 오리나 구운 메추리 살을 몇 점 올리면 ‘로제’ 샴페인과 잘 어울리겠다.

그 밖의 달지 않고, 날카롭고, 상큼한 맛의 샴페인들은 생선 요리, 해산물로 요리한 밥이나 국수, 배나 복숭아와 같은 연한 색의 과일 등에 매치하면 좋다. 큰 맘 먹고 샴페인 한 병을 구입했다면, 그에 맞는 메뉴까지 신경을 쓰자. 맛이 극도로 섬세하기 때문에 마늘이나 피스타치오, 초콜릿과 같이 고유의 향과 식감이 넘치는 식재료는 배제하는 것이 좋다.

샴페인도 무척 좋아하지만, 사실 나는 전통주 마니아다. 본 칼럼에서 다뤘던 한산 소곡주를 특히 즐겨 마시고, 육회 비빔밥에는 이강주, 사골 육수 국시에 부추김치를 곁들이면 안동소주를 찾는다.

그러나 샴페인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과정, 그 선두에 있었던 ‘여장부 퐁사르당’의 용기가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분명 우리 전통주와 그 출발은 비슷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 뉴욕과 도쿄 등의 대도시에 한국 음식점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는 지금이 우리의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박재은ㆍ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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