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 애들러 지음ㆍ임재서 옮김/사이언스 북스 발행ㆍ600쪽ㆍ2만5,000원
자유, 평등, 박애를 인류의 보편정신으로 부르짖으며 프랑스혁명을 이끌어낸 18세기말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척도(尺度)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혁명적 대의 뿐 아니라, 실재적으로도 곤란했던 것이 앙시앙 레짐(구체제) 하의 프랑스에서는 약 800개의 이름으로 25만개나 되는 도량단위가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량형의 통일이란 정치적 혁명 만큼이나 중차대한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고, 엄청난 저항을 극복해야하는 일이기에 선뜻 손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스웨스턴대 역사학과 겸임교수인 지은이는 미터법 규준 마련에 나섰던 장 바티스트 조제프 들랑브르(1749~1822)와 피에르 프랑수아 앙드레 메솅(1744~1804)이라는 두 명의 성실한 천문학자의 측량원정을 꼼꼼하게 추적함으로써 ‘만물의 척도’로서 미터법이 쓰이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필요했는지를 증언한다.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 자오선(子午線) 길이의 1,000만분의 1을 새로운 단위 미터로 한다’는 프랑스과학아카데미의 결정에 따라 들랑브르와 메?응?정확한 자오선 길이의 측정을 위해 1792년 6월 각각 파리의 북쪽과 남쪽으로 떠난다. 정치적 대변혁기에 이뤄진 그들의 측량원정은 인간사가 길을 뚫어주면 자연이 그 발목을 붙잡고 자연이 문을 열어주면 인간사가 길을 가로막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들랑브르는 싣고가는 관측기구들이 고성능 무기로 오인돼 민병대로부터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넉 달간 겨우 64㎞ 밖에 전진하지 못할 정도의 악천후를 만나기도 했다. 남쪽 원정대장 메솅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늑대가 사람을 공격하고 담배와 총기를 불법적으로 거래하는 밀수업자와 산적이 득실거리는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관측지점을 찾아야했고, 잠시 머물던 바르셀로나에서는 사고로 늑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때마침 터진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전쟁은 남쪽 원정대의 발을 동동 구르게하기도 했다. 다른 원정대원들이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도 정확한 수치를 가져오는 데 7년이나 지체했던 메솅의 사정이 밝혀지는 과정도 흥미롭다. 메솅이 숨진 뒤 들랑브르는 그의 측량노트를 검토하다가 메솅이 자신의 데이터를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조작했음을 발견하고, 그가 자오선 측량작업을 그렇게 질질 끈 이유가 데이터를 손보기 위한 것임을 알아챈다.
미터법 제정사에 우스꽝스럽게 끼어든 에피소드이기는 하지만, 정확성을 종교처럼 삼았던 메솅이 귀국 후 프랑스 최고 천문가로 대접받으면서도 자신의 오류 때문에 자살을 시도할 만큼 우울증을 앓았다는 대목은 인간적 연민을 자아내기도 한다. 프랑스가 미터법을 제정했으나 영국을 제외하고 프랑스인들이 가장 늦게(1840년) 미터법을 받아들인 사정, 세계화를 이끌어가는 미국인들이 끝끝내 미터법을 거부한 이유 등 미터법의 제정만큼이나 사연이 많았던 미터법 확산의 뒷이야기를 살펴보는 흥미도 쏠쏠하다.
원제 ‘The measure of all things’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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