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일보 국제면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들이 성난 얼굴로 칼과 철봉을 들고 시위하는 장면이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남아공에서 흔히 보던 모습이었다.
다만 그때는 전 인구의 16%에 불과한 백인이 84%의 흑인을 억압ㆍ착취하는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항거하는 시위였는데, 이번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나가라”는 요구다. 벌써 외국인 노동자 30명 가까이가 살해됐고, 1만3,000여 명이 경찰서, 병원, 교회, 학교 같은 데 숨어서 테러를 피하고 있다고 한다.
■집단 린치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일부에서는 외국인을 불에 태워 죽이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피해자는 대부분 인근 짐바브웨, 모잠비크, 나이지리아에서 내전 등을 피해 남아공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남아공 전체 인구는 4,900만. 합법, 불법 이주민은 300만~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거의 모두 흑인이다. 백인이 아닌 흑인이 흑인을 핍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단순하다. “외국인은 필요없다. 그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 남아공의 실업률이 30%에 육박하는 점을 고려하면 사회적 좌절과 분노가 외국인에 대한 화풀이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번 사태를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로 진단한다. 수백 년 동안 소수 백인들에게 그토록 학대 당했던 흑인들이 이제 다시 같은 흑인들을 학대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혹독한 시어머니를 모신 며느리가 나중에 더 악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얼마 전 건국 60주년을 맞은 이스라엘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동안을 전 세계를 떠돌다가 남의 땅을 빼앗아 겨우 정착한 이후 그 땅의 사람들을 지금까지 괴롭히고 있다. 나치에 의해 600만이 학살 당한 민족이 다시금 가해자로 변한 것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던 중국이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면서 주변 나라들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날조하는 행태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꼭 남의 나라 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한국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40만이나 되고 국제결혼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인도 점점 늘고 있다. 외국인 범죄에는 유독 촉각을 곤두세운다. 경제가 나빠지면 불만의 화살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우리 안에 숨어 있을지 모를 제노포비아에 생각이 미치면 섬뜩하다.
이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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