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륭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ㆍ536쪽ㆍ1만4,000원
박상륭(68ㆍ사진)씨는 텍스트주의자다. 그에게 글(텍스트)은 기존 세계의 묘사나 해석을 넘어, 한 세계를 새로 짓기 위한 재료다. 스스로 “<죽음의 한 연구> 의 마지막 5부”, 즉 <죽음의 한 연구> (1975)와 3부 4권으로 구성된 <칠조어론> (1997)을 잇는 완결작으로 규정한 <잡설품(雜說品)> 엔 동서고금의 경전, 신화, 철학, 문학 텍스트가 불려나와 작가의 웅숭깊은 사유를 구축한다. 잡설품(雜說品)> 칠조어론> 죽음의> 죽음의>
20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박씨는 제목 뜻에 대해 “잡설은 경전과 소설의 사잇글이란 뜻이고, 품은 불교 경전에서 내용을 담는 그릇을 뜻하는 단어”라고 설명했다. 평론가 김윤식씨가 작년 10월 한 일간지에 칼럼 ‘차라투스트라 박상륭을 기다리며’를 싣고 박씨의 신작을 독려했던 일이 이번 책 집필 계기가 됐다는 뒷얘기가 흥미롭다.
위의 세 연작은 여러 설정을 공유하면서 주제ㆍ배경의 스케일을 키워나간다. <죽음의 한 연구> 는 주(周) 문왕(文王)이 귀양살이하며 주역을 완성한 곳의 지명을 딴 지역 ‘유리’를 무대로 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머슴으로 섬기던 스승을 죽이고, 유리의 5조(祖) 촌장이던 스승을 이어 6조가 된다(중국 선종의 법문 계보인 동토6조를 차용한 설정이다). 살인자인 그를 처형하고 7조 촌장이 된 ‘촛불승’은 <칠조어론> 의 주인공이 돼 고통과 죽음의 세계에서 고행길을 걷는다. 칠조어론> 죽음의>
<잡설품> 은 중세 유럽으로 공간을 확장한다. 예수의 유물인 성배(聖杯)가 안치된 문잘배쉐성(城) 성주의 아들 ‘시동’은 큰 숲들 너머에 있다는 불새의 성을 동경하던 중 이끼 걷힌 오래된 성벽에서 발견한 ‘모든끝은그러나시작에물려있음을!’이란 글귀를 화두처럼 삼고 길을 나선다. 잡설품>
유리에서 온 노승이 자신으로부터 8조의 법통을 이을 그를 가르치고 지켜본다. 그런데 불새를 찾아나선 시동의 순례길은 내용에서든 구성에서든 작가의 잡설을 단단히 잡아매는 말뚝이 되지 못한다. 작가가 선뵈는 화제 및 형식 변주가 그만큼 활달한 까닭이다.
형식 면에선 전작 <소설법> (2005)에 이은 희곡 형식의 과감한 활용이 이채롭다. 작가는 지문보다 대사를 우위에 둠으로써, 이번 소설이 묘사ㆍ서술보다는 언명에 방점을 두고 있음을 알린다. 시동의 스승을 정점으로, 등장인물 간의 지적 위계가 뚜렷한 까닭에 그들의 대사는 대화라기보단 문답에 가깝다. 소설법>
희곡 꼴을 안 갖춘 부분을 이끌어가는 전지적 화자 또한 고도의 추상적 언설을 쏟아낸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시동의 구도(求道)를 지켜보는 ‘로드무비’적 재미보단, ‘잡설-철학자’ 박씨의 압도적 정신세계를 탐방하는 지적 재미가 앞선다. ‘박상륭표 문장’도 여전하다. 그는 문장에 줄기차게 쉼표를 찍으며 사유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판소리꾼의 화법으로 특유의 입말투를 선뵌다.
작가는 고대 경전부터 노엄 촘스키까지 섭렵하며 온갖 형이상학적 주제를 자유자재로 주무른다. 그에게 소설은 구상(concrete image)을 추상(abstract idea)화하는 고도의 정신적 작업이지, 결코 그 역이 될 수 없다. 그는 문명마다 각기 다른 신학ㆍ철학적 개념을 종합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이념 논쟁, 전투적 페미니즘,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한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추상적 입장 없이 현재와 역사를 논하는 일을 작가는 이렇게 일갈한다. “저 나무꾼에겐 사실(邪實)이, 저 젊은네들께는 사실(史實)로 아무 의문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 사실(事實)은 중요하다 말이지. ” (103쪽)
박씨는 “<죽음의 한 연구> 가 생사(生死), <칠조어론> 이 고행의 문제에 집중했다면, <잡설품> 은 해탈을 주제로 한 책”이라고 말했다. 불새를 손에 넣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문잘배쉐를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죽어 육탈된 시동의 해골에선 “모든길은그러나시작에물려있음을! 아으, 그런즉슨, 시작하지 말지어다!”(486쪽)란 말이 흘러나온다. 깨달음은 저 너머(불새의 성)가 아닌 속세(문잘배쉐)에서 추구할 일임을, 시동은 광야의 예수처럼 죽음으로써 알린 것일까. 잡설품> 칠조어론> 죽음의>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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