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타계한 박경리씨가 생전 마지막으로 기고한 산문이 23일 발간된 계간 문예지 <아시아> 여름호에 실렸다. ‘물질의 위험한 힘’이란 제목의 이 산문에서 고인은 생명이나 정신적 가치 대신 물질주의가 만연하는 사회에 대한 위기의식과 비판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아시아>
<아시아> 와 토지문화관 관계자에 따르면 <아시아> 에서 2월 ‘작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주제로 산문을 청탁했을 때 박씨가 건강 문제로 직접 쓰긴 힘들겠다고 했고, 이에 따라 <아시아> 편집위원인 방민호 서울대 교수가 3월10일 토지문화관을 방문해 박씨의 육성을 녹취했다. 이를 토대로 작성된 산문은 4월 중순 이메일 형태로 토지문화관 측에 전달됐고, 박씨의 딸 김영주씨가 이달 4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모친을 대신해 교정을 본 뒤 17일 최종 기고했다. 아시아> 아시아> 아시아>
글은 “최근에 나는 식중독을 두 달간 앓았습니다”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병인 고혈압, 당뇨병까지 겹쳐 기력이 많이 떨어졌다면서도 박씨는 “나는 죽음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면서 나이가 들고 쇠약해졌지만 비관과 절망보단 “오히려 인생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살아 있는 것,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요즘처럼 그렇게 소중할 때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박씨는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능동적이기 때문”이라면서 이에 반대되는 피동성을 지닌 ‘물질’과 대립각을 세운다. “피동적인 물질은 죽지도 살지도 않습니다”면서 박씨는 “죽지도 살지도 않는 마성적인 힘”이 인류에게 “대량 살상 무기” “지구 온난화”에 버금가는 해악을 끼칠 것을 우려한다.
박씨는 물질의 만연이 현대인의 정신을 황폐화한다고 지적한다. “높은 도덕률과 가치관을 요구”하던 민족주의가 약화되는 오늘날, “현대 사람들은 이해관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건조하고 즉물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는 것. 이어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모두 물질에 들린 삶을 살아가는 체계”이자 “스스로 멈출 줄 모르는 물질적 메커니즘에 사로잡힌 세계”라고 박씨는 비판한다.
박씨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상업적인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라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의 산물을 가지고 어떻게 상업적인 계산을 한단 말입니까”하고 되묻는다. 이어 “나는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말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면 종놈 신세 아닙니까”하고 일갈한다. 박씨는 “출판사 저자 사인회” “방송국 출연 섭외”에 작가가 응하는 것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마지막 단락에서 박씨는 “요즘 나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예순 편 정도를 추려서 시집을 내려고 생각합니다”라면서 말년의 구상을 밝히고 있다. “소설을 써온 내게 시는 나의 직접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목소리를 지닌 것”이라고 규정한 박씨의 글은 “요즘의 내가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양식에 더 이끌리고, 물질적이고 인위적인 것의 위험한 힘을 더욱 경계하게 되는 것은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