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장수 노인경로당’. 조병현(60)씨가 오른손에 가위, 왼손에는 빗을 들고 현란하게 손을 움직였다. 조씨에게 머리를 맡긴 유영국(83) 할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조 선생이 머리 해주면 기분이 좋아. 할매도 예쁘다 하고….”
조씨는 18년 전부터 매월 세번째 토요일이면 이 곳을 찾는다. 1990년 북가좌동 인근 목욕탕에서 이발소를 운영할 때부터 인연을 맺었는데, 그해 말 서울 강서구 신정동으로 이사간 뒤에도 이발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매월 한번 올 때마다 그의 손길을 거쳐가는 노인은 약 30여명. 오전 8시부터 해질녘까지 하루 종일 가위질을 하는 바람에 힘들 것도 같은데,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거동이 불편해 노인정에도 못 오는 노인들은 아예 집까지 찾아간다. 그래서 북가좌동 어르신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조씨가 봉사를 하는 곳은 이곳 경로당뿐만 아니다. 북가좌동 경로당과 인연을 맺기 10년 전인 1980년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순서를 정해 은평천사원, 서울재활병원, 화곡동 밀알공동체 등을 찾아가 어린이와 환자들의 머리를 다듬어 주고 있다.
조씨는 “결혼 후 1년만에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봉양 한 번 제대로 못한 게 한이었다”며 “못 다한 효도를 다른 사람에게 하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토요일마다 20여명의 머리를 깎아줬으니, 28년 봉사를 통해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연인원 기준으로 3만명이 넘는 셈이다.
28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버스, 지하철로 이동하며 힘들게 봉사를 해왔으니, ‘너무 힘들어 더는 못하겠다’는 위기의 순간도 물론 있었다.
“이발 봉사를 시작한 지 8년 정도 됐을 때였어요. 저도 사람인지라 몸살이 나고, 감기가 걸리는 바람에 ‘오늘도 나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몸을 추스려 은평천사원에 가서 애들 머리를 다듬었는데, 오후 7시쯤 한 꼬마 순서가 됐습니다. 아직 머리카락이 덜 자랐길래 ‘너는 아직 괜찮으니, 다음에 와서 깎자’라고 했죠. 그러자 애가 그 자리에서 엉엉 울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 순간, 조씨 가슴에 ‘쿵’ 하고 와닿는 게 있었다. ‘나는 저 아이에게 이발사가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이구나.’ 당연히 그 후론 아무리 힘들어도 목 놓아 울던 아이를 생각하며, 도구를 챙겨 집을 나섰다.
조씨는 “그 해부터 천사원 아이들은 ‘이발사 아저씨 너무너무 감사합니다’라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경로당 할머니들이 지어주는 따뜻한 쌀밥과 감사하다는 말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선행은 전염성이 강했다. 조씨의 봉사활동은 다른 동료 이발사들도 감동시켰다. 조씨는 98년에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 이발사 14명과 ‘서대문지회 이발봉사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는 현재 회원이 28명까지 늘어났는데, 각자 사정에 따라 서울시 일대에서 이발봉사를 하고 있다.
돈벌이도 안되는 이런 일 때문에 바쁘게 일하는 남편과 아버지를 보며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조씨는 “주말 봉사 때문에 아내와 아들, 딸 등 네 식구가 나들이 나가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가족들은 오히려 든든한 지원자였다. 올해 서른둘, 스물여덟 살인 큰 아들과 딸은 생업 때문에 이제는 도와주지 못하지만, 학창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와 머리를 감겨주기도 했다. 부인도 남편을 도와주며 어깨 넘어 배운 솜씨로 충북 음성꽃동네에서 이발봉사를 하기도 했다.
조씨는 요즘 더 큰 봉사를 준비하고 있다. 주말마다 찾아가는 게 아니라, 아예 복지시설을 만들어 어려운 노인들을 직접 모시고 돌보는 게 그의 꿈이다. 조씨는 “3년 전 북가좌동 이발소를 정리하고 주말 봉사만 하는 것도, 복지시설 운영에 필요한 사회복지사 자격증 공부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 손을 거쳐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를 보면, 받는 사람도 즐겁고 하는 사람도 즐겁다”는 조씨는 “여건이 되고, 힘이 닿는 한 앞으로도 계속 봉사활동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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