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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주말농장

입력
2008.05.23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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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집 밥상이 화려하다. 상추 쑥갓 아욱 열무 겨자잎 등 다양한 푸성귀가 입맛을 돋운다. 얼마 후엔 치커리와 시금치, 고추, 깻잎이 식탁에 오를 것이고 가을엔 고들빼기와 고구마도 맛볼 수 있다. 33㎡(10평)도 채 안되는 땅에서 그렇게 많은 작물을 재배할 수 있고, 소출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한 평 남짓에 심은 상추나 열무는 이 달 초부터 우리 식구가 먹고도 늘 남아서 주변에 나눠줘야 할 정도다.

청계산 등산로 입구 주말농장에 발길이 머문 건 지난해 봄이다. 처음엔 심심풀이로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 매력에 빠져버렸다. 지난해 가을 무와 배추를 심어 김장까지 한 후부터는 올해 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올해엔 재배면적도 두 배로 늘리고 작물도 다양하게 심었다. 초기엔 등산길에 밭을 보살폈지만 요즘엔 매일 새벽 밭으로 가는 길에 산에 오른다. 주말에 아무리 멀리 외출하고 돌아올 때에도, 심지어 해외출장을 다녀온 날에도 들른다.

세상에 태어나 내 손으로 처음으로 씨를 뿌리고, 풀을 뽑고, 물을 주며 키워 그걸 먹을 수 있었다는 게 놀랍고 대견했다.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농약은 물론, 화학비료조차 뿌리지 않은 유기농산물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아이와 함께 자연과 교감하며 하나하나 배우는 즐거움이 더 크다.

바람에 쉬이 흩날리는 티끌 같은 상추씨가 흙을 비집고 나오고, 좁쌀보다 작은 무씨가 자신보다 수십배나 무거운 흙을 아예 번쩍 들어올리며 고개를 내미는 모습은 드라마틱하다. 고구마의 끈질긴 생명력은 또 얼마나 경이로운가. 고구마순을 잘라 땅속에 심어놓으면 줄기가 죽은 것처럼 말라 비틀어지면서도 새싹이 나온다. 또 어떤 씨든 깊이 묻으면 싹이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얕게 심으면 웃자라고 허약해지는 걸 보면서 식물이건 사람이건 건강하게 뿌리내리기 위해선 적절한 시련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 본다.

오호라! 바로 이거였구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집 근처에 땅을 빌려 밤 늦게까지 일구시는 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젠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엇이든 그 나이가 돼야 느끼고 알게 되는가 보다.

이뿐인가. 가족들과 나가서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다보면 옆에 있는 이웃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금방 친하게 된다. 요즘 아파트 생활에서는 아무리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도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지만 거름냄새를 맡으며 흙투성이가 되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말을 건넨다. 함께 어울려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며 이야기를 나누면 인심 후한 시골마을로 금세 돌아간다.

서울과 경기지역은 물론, 지방도시 주변에서도 이젠 주말농장이 대중화 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서울시만 해도 양평 팔당호 주변과 한강시민공원에서 12만㎡(3만3,000평)를 봄마다 분양하고 있다. 올해 분양은 끝났지만 농사는 늦지 않았다. 지금은 고구마와 들깨를 심을 때이고, 열무나 상추는 심은 지 한 달 후면 수확할 수 있다. 또 김장 배추와 무는 추석을 전후해 씨를 뿌리면 된다.

주말농장은 삭막한 도시생활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창이자 일상 스트레스를 씻어내는 해방구다. 생명의 원천인 흙을 밟고 땀을 흘리는 만큼 건강해진다. 괭이로 파고 호미로 김을 매다보면 이제껏 보이지 않던 세상이 열린다.

최진환 사회부 전국팀장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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