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이었던 그 해 8월 5일부터 15일까지 10박11일 동안 나는 ‘조국순례 대행진’ 행사의 주인공이었다. 안면도에서 청주 공설운동장까지 그 먼 길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땡볕과 싸우면서 발이 부르트는지, 얼굴이 얼마나 타는지도 모른 채 걷고 또 걸었다. 그것이 나의 삶에 시련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에너지를 주었는지, 젊은 날의 치기에 불과했는지, 시간 낭비였는지 아직 정확한 답을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함께 걸었던 대학생들은 모두 빚진 자이며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준비해 간 쌀로 밥은 했지만 김치와 반찬과 음료는 잠시 머물렀던 시골 학교 마을의 주민들께서 정성껏 제공해 주셨다. 우리의 요청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시골 어르신들의 접대(?)를 분명히 받았다.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2,3,4학년 때에는 조국순례 대행진을 본떠 우리 동아리가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향토순례 대행진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그 때도 시골 어르신들의 신세를 지곤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동네 처녀 총각들의 부러운 눈초리를 기억하고 있다.
어르신들은 왜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움을 주었을까?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깊게 느끼지 못했는데, 그 때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이제야 들려오고 있다. “그대들은 머지않아 이 나라와 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가 되는 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해 주십시오. 특히 우리들처럼 열심히 일하지만 즐거움이 별로 없는 농민들과 어민들에게 기쁨을 주면 고맙겠습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려왔다. 당시에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이기에 받은 혜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미래 사회의 주인공이었기에 받았던 혜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채무는 아니지만 채무라고 생각해야 옳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든 적든 국가나 사회로부터 적잖은 혜택을 받아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장학금을 받았고, 교통비나 입장료 등을 할인 받았으며, 공짜로 얻는 것도 있었다.
직접적이지 못해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국가가 중ㆍ고교와 대학에 지원했기 때문에 모든 대학생들은 국가의 혜택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국립대나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화장실 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다고 본성대로만 살면 안 되는 것이 인간인 것도 분명하다. 대학 진학률이 30% 미만이었던 시절에 대학에 다녔던 사람들은 사회적 책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고, 깨달았다면 은혜를 되갚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
잘 났기에, 공부를 잘 했기에, 남보다 노력을 많이 했기에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산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 형제의 노력이나 희생과 함께 국가와 사회의 도움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 가난한 이웃들의 도움과 희생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오늘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대졸자이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빚진 자이십니다. 이 땅의 이웃들, 특히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뒤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그 일을 은혜 베풀기가 아니라 은혜 갚기로 이름 붙인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권승호 전주 영생고 교사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