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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20> 바닥추락직전 구사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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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20> 바닥추락직전 구사일생…

입력
2008.05.19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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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군단과 통역관들이 속속 도착하자, 홍콩영화계는 극도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선 별도로 한국인 담당 중역도 임명했다. 상하이 출신의 친한 인사인 ‘황위’이사다. 선친이 일제 때 한국 화교였다며 나를 각별히 사랑해 주시던 분이다.

회사의 모든 영화의 제작은‘쇼’회장과 같은 상하이 출신인 레이몬 쵸 제작담당 사장이 결정했다. 일찍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가 그 곳에서 세계영화시장을 익힌 쵸 사장은 <쇼브라더스> 를 세계적인 회사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1970년대 초 <쇼브라더스> 를 떠나 <골든하베스트> 를 설립하는데 이때 이소룡을 발굴하는 등 80년대 홍콩영화의 제2전성기를 만든다.

회사는 새로 영입한 한국군단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즉각 작품 결정을 했다. 우선적으로 내 출연작품이 결정됐다. 무협영화 <12금전표>. 두 무사가 사부의 딸을 가운데 놓고 싸우는 이야기. <외팔이> 시리즈 장철감독의 제1조감독 출신 서증광 감독의 데뷔작이다. 쵸 사장은 쇼 회장 못지않게 나를 아껴 주었다. 그는 나에게 두 주인공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두 인물의 성격은 극단적으로 달랐다. 서민 출신의 선한 무사 역과 부호 출신의 악한 무사 역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선한 역할만 한 터라 악역을 원했다. 프로듀서와 감독이 놀랐다. 일반적으로 주연 배우들이 이미지 관리상 악역을 기피하는데 뜻밖이라는 것이다.

‘선해 보이는 내가 악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드라마 아니겠느냐’고 하자 그들도 대찬성이었다. 선한 역은 당시 악역 주인공을 도맡아 하던 성격배우 로래(羅烈)가 맡았다. 여주인공은 인기가 정점에 오르고 있는 찡리(井莉)였다.

<쇼부라더스> 는 스튜디오 안에서 <남국영화배우학교> 를 운영하며 신인배우의 연기와 무술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아시아 전역에서 10대의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10년 이상 장기 전속계약을 체결, 기숙사 및 일반교육비까지 제공하고 연기, 노래, 무술 등을 가르쳐 스타로 만들었다. 당시 최고의 스타 왕위, 로래, 쳉 페이 페이, 리 칭, 허 리리, 징리 등이 남국영화배우학교 출신이었다.

서 감독은 외팔이를 비롯하여 <방랑의 결투> 의 무술감독 출신이어서 나에게 무술과 승마교육을 호되게 시켰다. 중국무술의 기초는 무용 같았다. 모든 것이 몸의 율동과 호흡으로 이루어졌다. 승마교육장과 무술연습장은 야외 스튜디오 너머 넓은 벌판에 있었다. 무술교육 4시간, 승마교육 4시간. 대사 훈련 4시간….

이어서 정창화 감독의 작품이 결정되었다. <007>시리즈 류의 현대 첩보물 <천면마녀> . 성훈과 임지운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상대역 여배우는 무술이 뛰어난 섹시스타 김배. 촬영과 미술은 일본의 이노우에 촬영감독과 구로다 미술감독팀이 결정되었다. 정 감독이 중국인들과의 언어와 문화의 벽을 여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한국배우와 일본 스탭으로 팀을 구성하자 지금까지 우호적이었던 중국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우선 내 촬영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최대의 전투장면이었다. 연기자와 스탭 수가 1,000명이 넘었다. 촬영 1주일 전부터 촬영지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주요 배우와 스탭은 그곳에서 거주하며 준비를 하였다. 찡리를 쟁탈하기 위해 나와 로래가 초원에서 군사를 이끌고 대결하는 영화의 클라이막스 장면이었다. 로래의 승마술과 검술은 혀를 찰 정도로 뛰어났다.

나는 남국배우학교에서 검술과 승마술을 배웠다곤 하지만 카메라 기술과 콘티 도움 없이는 그의 대적 상대가 아니었다. 수십 필의 말과 수백 명의 군사가 극렬하게 부딪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무려 5대의 카메라가 동원되었다. 공중 촬영을 위해 헬기가 떴고 호를 파서 지하에 카메라가 배치되고…. 감독은 충격적인 앵글을 잡겠다며 직접 말을 타고 달리며 카메라를 잡았다.

드디어 촬영 날이 왔다. 동이 트기 전에 모든 연기자가 분장과 의상을 갖추고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각자의 소품을 받았다. 문제는 이때 생겼다. 내가 검을 차고 말을 타려는 순간 로래가 다가왔다. 그리곤 내 말을 한번 타 보자며 말 등에 오르더니 쏜살같이 몰고 사라졌다.

내가 발을 동동 구르는데 한참 후에 나타나 말이 순해 잘 뛰지 못한다며 자기 말을 타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찔했다. 그의 말은 털을 박박 깎은 서부영화에서 인디언 추장이나 타는 안장도 없는 야생마였다. 나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내가 훈련한 말을 타겠다고 하였다. 우리가 승강이를 하는 동안 스피커를 통해 감독이 명령을 내렸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허밍쭝은 빨리 1번 카메라 쪽으로 와라!!” 해가 수평선 중앙지점에 걸릴 때 나는 태양을 향해 달려야 한다. 조감독이 달려왔다. 어서 말을 타고 능선 위로 올라가 감독 지시를 받으라는 것이다. 로래는 껄껄 웃으며 내 말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장면이라도 대역없이 100% 훈련해왔던 나였다.

일단 그 무시무시한, 털 하나 없는 회색의 점박이 말 위로 몸을 날려 올라탔다. 순간이었다. 내가 고삐를 잡자마자 말은 총알 같이 달렸다. 아니, 날아갔다. 말은 이미 재갈을 물은 상태였다. 아무리 고삐를 당겨도 내 몸만 뒤로 젖혀질 뿐이었다. 나는 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의 등에 몸을 찰싹 붙였다. 말은 나를 죽이려는 것 같았다.

일부러 낮은 나무 사이로 달렸다. 머리에 쓴 가발이 벗겨지며 끈적한 액체가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말 등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뭇가지에 찢긴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고통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바다 끝까지 가는 게 살길이라며 그의 등을 죽자살자 붙들었다.

차츰 나는 지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등위에 매달릴 기력이 없었다. 마침내 멀리 숲이 나타났다. 나는 그 곳을 지나는 순간을 포착하기로 하였다. 숲이 다가왔다. 나는 비호같이 몸을 날렸다. 절벽 사이로 보이는 파아란 바다, 암벽에 부딪혀 깨지는 하아얀 파도….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다. 나는 공중에서 몸을 숲 쪽으로 회전시켰다.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차고 있던 검이 검 집에서 튀어나와 눈앞에 꽂혀 있었다. 태양은 이미 수평선 중앙을 넘어 붉은 빛으로 나의 검을 비추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파도가 바위를 치며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는 나뭇가지 위에 걸쳐 있었다. 눈을 감자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살았구나….

이때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서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허밍쭝, 흥 하오!! OK!!OK!!”

감독은 이 장면을 처음부터 놓치지 않고 헬기에서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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