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 시절 수려한 외모와 폭발적인 3점슛으로 연예인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던 우지원(35ㆍ울산 모비스). 그가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한 건 2002년부터였다. 우지원은 97년 프로농구 창단 멤버로 합류한 이후 평균 15득점 이상을 꾸준히 올렸던 공격형 선수였다. 그러나 모비스 유니폼을 입은 2002년부터 시련이 시작됐다.
수비를 중시하는 팀 컬러에 우지원의 3점포는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급기야 우지원은 후보로 밀렸고,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다. 코칭스태프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었고, 다른 팀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을 수도 있었다.
그러던 중 우지원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프로 진출 이후 처음으로 우승 반지를 손가락에 끼게 된 것. ‘코트의 마당쇠’라는 별명을 얻으며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던 2006~07시즌이었다.
“당시 우승을 하지 않았더라면 선수로서 개인적인 유혹에 흔들렸을 지도 모릅니다. 다른 팀에 가면 더 많은 시간을 뛸 수 있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승은 농구에 대한 저의 생각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줬습니다.”
우지원은 그 해 우승 반지와 함께 소중한 트로피 하나를 거머쥐었다. 2006~07시즌 우수후보선수상이 그것.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마음껏 축하해줄 수 없었다.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만 받았던 화려한 주연에게 후보선수상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지원은 달라져 있었다. “이렇게 팀에 필요한 선수로 뛰면서 모비스에 남을 겁니다. (양)동근이랑 (김)동우가 상무에서 제대하면 다시 한번 우승하고 정상에서 은퇴해야죠.”
명예로운 은퇴와 지도자 생활. 이제 우지원은 어느덧 현역 이후를 생각해야 할 정도의 나이가 됐다. 그러나 앞으로도 최소한 2년은 더 뛴다. 전희철(SK) 등 동기생들이 은퇴위기에 몰린 가운데 우지원은 14일 구단과 2년 최대 4억8,000만원에 계약했다.
지금 같아서는 4,5년이라도 더 뛸 수 있을 것 같지만 우지원은 과한 욕심을 내지 않는다. 지금처럼 후배들을 도우며 소금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다.
우지원은 2년 전부터 골프도 시작하고, 주위 사람들도 챙기기 시작했다. 인생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여덟 달 후인 내년 초에는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 행복한 우지원. 그는 둘째 아이에게는 더욱 푸근하고 여유로운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허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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