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자동차만 외국에 팔라는 법 있나. 영화관, 자동차보험, 우편서비스도 해외에 팔 수 있다. 아니 팔아야 한다. 작은 국내시장에만 중점을 둔다면 아무리 전통을 자랑하는 업체라 해도 정체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 업종을 막론하고 해외시장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내수 기업들이 ‘국경’을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제조업의 수출성장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서비스업에 기반한 내수업체들의 해외진출은 경제성장의 전제 조건이다. 차츰 좋은 소식들도 하나 둘 들린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 해외로 나가 성장 되찾은 내수기업들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을 딱 잘라 구분하기는 사실 모호하다. 매출 중에서 수출이 50%를 넘으면 수출기업, 그 반대는 내수기업으로 분류하는 정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수출기업과 내수기업이 지나치게 이분화돼 왔다. 해외에 알려진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는 오랫동안 반도체, 자동차, 휴대폰, 조선 등 일부 제조업체에 한정돼 있었다.
산업연구원 하병기 선임연구위원은 “1980년대까지 정부에서 외환관리를 위해 수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업종은 해외진출을 자제하도록 했던 것이 일부 업종을 제외하고는 내수에 중점을 두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내수기업들은 90년대 후반,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해외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늦긴 했지만, 발 빠르게 대응한 기업들은 국경 넘어 성장의 돌파구를 찾고 있다.
전형적인 내수 업종인 극장업. 그러나 이젠 극장도 수출되고 있다. 14일 롯데시네마가 국내복합 상영관 업체로는 처음으로 베트남에 진출했다. 앞서 CGV와 메가박스가 각각 중국의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개점했는데, 베트남 진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롯데시네마는 “베트남은 영화 관람 인구 증가율에 비해 스크린 수와 영화관 부대시설이 크게 부족하다”며 “한국적인 영화관 운영 노하우를 살려 새로운 멀티플렉스를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이젠 수출되지 않는 것은 없다. 심지어 우체국도 수출한다. 우정사업본부는 우정물류시스템인 ‘포스트넷’을 앞세워, 카자흐스탄 등에 우편서비스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내수에만 머무르고 있는 업종은 더 이상 찾기 힘들다. 작은 한국 시장에서는 그만그만한 업체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펴졌기 때문이다.
제과업계가 해외시장 공략으로 성장의 힘을 되찾은 과정은 내수기업도 ‘국경’을 넘어야만 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제과업계는 피자, 햄버거 등 수많은 먹거리가 등장하면서 국내에서 큰 침체기를 겪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오리온은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 해외시장에 진출해 지난해 해외매출액이 국내 매출액의 절반에 육박하게 됐다.
2010년 쯤에는 해외매출액이 국내 매출액을 추월할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분류기준대로라면 내수 아닌 수출기업이 되는 셈이다. 오리온은 중국에서 초코파이 무료시식회를 하면서 주변의 쓰레기통은 모두 감추는 ‘트래쉬 마케팅(trash marketing)’까지 했다. 초코파이 겉포장지를 행인들이 최대한 오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오리온의 성공으로 롯데제과 등 다른 제과업체들도 해외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며 추격하고 있다. 한 업체가 해외시장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는 모습이, 그 업계 전체의 경쟁을 촉발시키고 시너지 효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여전히 선진국과 큰 격차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중국에 진출해 있는 각국의 할인점을 비교해 보자. 95년에 진출한 프랑스 까르푸가 110개 점포, 96년에 진출한 미국의 월마트가 102개 점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기업은 겨우 이름만 올려놓은 수준이다.
97년에 진출한 이마트가 11개, 2001년 진출한 메가마트가 3개, 지난해 진출한 롯데마트가 7개 정도다. 범중국 기업으로 분류할 수 있는 대만 업체에 밀리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태국업체인 로터스(75개 점포) 보다도 훨씬 적다.
대표적인 내수 업종인 서비스 업체들의 해외진출은 이처럼 우리나라가 극히 저조한 수준이다. 해외직접투자에서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6.6%. 80년대 29.5%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높아졌지만,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미국 일본 영국 등 다른 선진국들은 해외투자액 중 서비스업의 비중은 60~70% 가량에 이른다. 제조업 경쟁력이 높다는 일본도 서비스업 비중이 59.5%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80년대 35.3%에 불과했던 서비스업 해외투자 비중이 2000년대 들어 79.5%까지 높아졌다.
사실상 서비스업에 기반한 내수기업들의 해외진출이 영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브리티시텔레콤, 보다폰 같은 영국 통신업체들의 세계시장 석권 등이 그 원동력이다.
미국의 경우 도매ㆍ소매업, 금융업, 부동산업, 사업서비스 업체들이 앞 다투어 국제시장으로 나아가고 있고 영국은 통신업, 운수업, 금융업체들이 해외시장에서 큰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한국은 도매ㆍ소매업, 부동산업, IT기술을 기반으로 한 사업서비스업에서 상대적으로 해외시장 진출이 많지만, 건수에 비해 액수가 미미한 실정이다.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업종인 금융기업들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도 서비스업의 해외투자 비율이 저조한 이유 중 하나다.
기업들을 더 이상 ‘수출’이나 ‘내수’냐로 분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내수기업에만 맞는 성장논리라는 것도 따로 있을 수 없다. 해외 진출은 업종을 막론하고 기업이 성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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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HL '국경없는 배달망' 신화일궈
'배달' 하나로 세계를 석권한 기업. 독일의 특송업체 DHL은 전형적인 내수업체도 국경을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실증적 사례다.
물류, 통신, 건설, 금융 등은 전통적인 내수산업으로 분류된다. 제조업이야 물건을 만들어 국내든 해외든 내다팔면 그만이지만, 무형의 가치를 판매하는 서비스업은 나라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DHL은 설립 직후부터 이런 틀을 깨며 배달 서비스로 전 세계를 하나로 묶어왔다.
1969년 설립된 DHL은 세계 최초로 국가간 항공 특급 송ㆍ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업계 최초'라는 타이틀은 그 이후에도 줄곧 이어졌는데, ▲업계 최초 중국에서 서비스 개시 ▲업계 최초 독립국가연합 진출 등이 그런 예다. 내수에 머무르겠다는 것은 '성장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는 명제를 그대로 보여준 과정이었다.
한국에서도 업계 첫 서류 송ㆍ배달 서비스를 시작했고, 국제표준화기구의 품질인증인 ISO 9002를 획득했다. 69년에 설립된 기업이 국내업체와 대리점 계약을 통해 1977년 이미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놀랍다.
세계적 기업이 되는 과정에서 DHL은 몇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 우선 공격적인 재투자는 기본. 이라크 전 당시 난민구호 물품의 무료 배송에 참여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도 '트레이드 마크'다.
둘째는 고객불만을 100% 흡수하는 것. 아무리 좋은 서비스라도 불만은 있다. DHL은 각국별로 홈페이지를 통해 고객불만을 수용하고, 별도의 온라인 고객센터를 운용해 불만을 해결해준다. 특히 불만을 토로한 고객 중 추첨을 통해 기념품까지 주고 있다.
셋째. 배달도 첨단이라는 자세. DHL은 발송물 정보관리 시스템(SIS), 문서교환 시스템(EDI), 화물 전달 추적 시스템 등을 운용하고 있다. 고객의 화물을 건네 받는 순간 시스템이 자동으로 목적지를 분류하고 운송 가격과 소요 시간 등을 바로 알려주며, 화물이 발송되기 전에 해당 도착지의 세관에 화물 정보를 알려줘 빠르게 통관 절차를 마칠 수 있도록 한다.
스캐닝 시스템을 도입해 화물이 도착지에 배달되기까지 수차례 스캐닝 작업을 거쳐 정보를 저장한다. 때문에 고객들은 배송화물이 무엇인지 화물이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언제쯤 도착할 수 있는지까지 알 수 있다.
특히 DHL은 2003년 3월 미국내 특급운송업체인 에어본을 인수하면서 470억달러 규모의 미국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게 됐다. 취약 부분이었던 육상 운송 부문의 약점을 보완하며 한단계 성장한 것이다.
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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