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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서울은 깊다

입력
2008.05.13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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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지음/돌베개 발행ㆍ385쪽ㆍ1만8,000원

서울 사람들은 지난 600년간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서울대 국사학과)한 후 ‘서울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으로 10년 넘게 서울의 역사를 연구해온 저자가 도시 건축물이나 왕조의 역사가 아닌, 서울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역사학자 특유의 날선 시선으로 굽이굽이 풀어낸다.

서울 양반들은 18세기 무렵부터 시골 출신을 ‘시골뜨기’라고 낮춰 부르며 콧대를 높였다. 이전엔 정치적 위기 의식을 느낀 관료들이 부모 봉양을 핑계로 낙향하거나 죽음을 앞둔 재상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이쯤부터 도시상업이 발달해 부의 원천이 농토만이 아니라 자본으로 확대되자 더 빨리, 대규모로 돈을 벌 수 있는 서울 생활은 특권이 됐다.

‘경화거족(京華巨族)’이란 불린 서울 양반들은 출세나 과거 시험 정보도 배타적으로 공유하며 향인 출신들의 서울 입성 문턱을 높였다. 서울 선비들끼리 사륙문(四六文ㆍ중국 육조와 당나라 때 성행하던 4자, 6자 배열 한문 문체)을 익혀 새로운 과거 시험 출제 유형에 대비했지만, 시골 선비들은 배울 길이 없었다.

서울 상인들 사이에선 얼버무린 존대법인 ‘합쇼’체 서울 방언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팽창할수록 시장은 신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공간이 됐다. 장사꾼들은 양반인지 시골아전인지 무뢰배인지 모를 이들에게 무턱대고 존대를 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얼버무린 ‘어서옵쇼’란 인사말을 건네며 호칭에도 셈법을 적용했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에게 서울의 삶은 팍팍한 공간이었나 보다. 조선시대 서울에선 왕릉 후보지나 왕의 사냥터를 확보한다는 이유로 도성 주변 산에서 벌목을 금했다. 땔감이 부족한 서울 사람들은 쌀과 비단을 내다 팔았고, 궁궐 나인들은 조선 중기까지 온돌이 아닌 마루방에서 화로로 추위를 이겨냈다.

이 밖에 똥물, 똥개, 땅거지, 무뢰배, 촌뜨기, 남주북병, 종로, 전차, 덕수궁 돌담길, 물장수, 땅거지, 도깨비 시장 등의 말에 얽힌 서울의 풍속과 생활방식, 그 안에 숨겨진 일화와 사연들을 흥미롭게 소개한다.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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