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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19> 런런쇼 "감독해 볼 의향 있냐"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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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19> 런런쇼 "감독해 볼 의향 있냐" 제의

입력
2008.05.13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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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런쇼’는 마침내 아시아 영화의 중심 기지를 일본에서 홍콩으로 이동시키는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의 대표적 영화현상기술자 ‘도요다가 야마모토’ 동양영화현상소장을 거액으로 스카우트하여 아시아 최고의 현상소를 설립하고, 일본 최고의 영화미술감독 ‘기무라’ 팀과 전속 계약을 하였다.

또한 한국에 첫 상륙된 홍콩영화 <방랑의 결투> 가 허리우드 영화와 경쟁하여 크게 흥행하자, 한국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위해 한국감독과 배우를 더 영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전속 감독으로 영입 결정된 사람은 당시 한국 액션 영화의 대부라 불렸던 정창화 감독이었다.

‘국민감독’ 임권택 감독의 스승이다. 배우로는 당시 화려하게 데뷔한 신인 두 사람이다. ‘성훈’은 멜로드라마로 상종가를 치던 정진우 감독이 패티킴 노래의 <4월이 가면 (길옥윤 작곡)>을 영화화하며 뽑은 미남 배우다.

태권도와 유도 합산 10단이나 되는 유단자이면서 중앙대 학생회장 출신이기도 했던 그는 데뷔하면서부터 ‘신성일 아성’을 깨겠다고 호언한 그야말로 ‘신성’이다.

‘펄 시스터즈’가 여동생들이어서 스포트라이트가 더 뜨거웠다. ‘임지운’은 한국의 최대영화사 ‘연방영화사’가 벌린, 김래성 원작 <애인> 의 주인공 공모전에서 1000:1의 경쟁을 뚫고 데뷔한 제2의 김진규가 될 것이라며 혜성처럼 등장한 샛별이다.

이렇게 한국영화계의 ‘진주 감독’과 ‘새 보석’을 홍콩으로 스카우트 한 것이다. 이 한국군단이 도착하기 전까지, 나에게는 6 개월의 긴 시간이 흘러갔다.

당시 한국영화는 촬영 후 성우들이 후시 녹음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홍콩에서는 모두 동시 녹음이어서 배우들이 중국어(북경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통역이 필요했다. 한국어와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국화교 뿐인데 한국화교는 대부분이 산동 출신이어서 표준 북경어에 능숙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영국령인 홍콩은 공산주의자와 그 가족들은 비자 발급이 불가능하여 화교이더라도 국적이 대만으로 제한되어 더 구하기 어려웠다. 통역관이 도착하기 전까지의 그 기간은 지금 생각하면 하늘이 특별히 나에게 짜 준 스케줄이었던 것 같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세계최고의 천재적 영화전문가 ‘런런쇼’의 특별한 지도와 사랑을 받았다. 그때의 경험이 현재의 나를 40년이 넘도록 세계를 누비며 영화의 전 분야에 뛸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런런쇼’는 나에게 매우 특별했다. 아니 그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다. “What's new?” 이것이 바로 그가 나에게 준 숙제였다. 우리는 새로움의 발견과 개척을 위해 둘만의 시간을 가졌고, 그는 지금의 성공의 비결을 나에게 하나씩 알려주었다.

그는 매일 나와 함께 할 점심을 집에서 가지고 왔다. 나는 그에게 답변 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매일 24시간을 연구하고 뛰었다. 새벽부터 뛰어나가 홍콩을 뒤졌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물을 만났다. 사내 시사실에서 홍콩의 모든 영화들을 하루에 5, 6편씩 밤새며 보았다.

런런쇼는 중국 문화를 처음으로 접한 젊고 패기 발랄한 외국인의 눈을 통해 ‘숨어 있는 그것’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그는 눈만 뜨면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며, 영화의 꿈을 갖은 한 젊은 한국 영화인으로부터 홍콩영화의 새로운 지표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주는 점심 한 끼는 정말 비싼 것이었다. 나 역시 그 고가의 점심을 먹기 위해 얻은 것이 더욱 크고 많았다.

홍콩에 살고 있는 다인종의 치열한 생존경쟁, 이데올로기의 처절한 충돌, 매일 새벽이면 구룡성 밖으로 버려지는 알 수 없는 시체들. 끊임없이 벌어지는 테러와 폭동... 나는 너무도 힘들어 빅토리아피크(홍콩 섬 정상)까지 올라가 홍콩의 야경을 보며 고향이 그리워 통곡하며 울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 식당은 ‘구룡 침사초이(九龍 尖沙咀)’에 있는 ‘만나’식당이 유일했다. 그 곳에 가면 한국 음식과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향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곳마저도 갈 수 없게 된다. 그 식당에 출입하는 한국인 중 이중간첩들이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영사관에서 정보부 파견 영사가 나를 불러 주의를 주었다. 내가 자주 만나는 한국인 한 사람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것이었다. 눈앞이 노래졌다. 공작원으로 지목된 사람은 내가 홍콩에 도착한 그 날 밤 공항에까지 나와 나를 환영해 준 고등학교 선배였다.

그는 나의 가장 가깝고 따뜻한 후원자였다. 영국 유학생 출신이었던 그 선배는 홍콩 중심가에 큰 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수시로 세계와 중국에 대해 지식을 일러주었다.

나는 그를 만나는 것마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나는 지치지 않았다. 아니, 그럴수록 그에게 매일같이 제출하는 나의 노트 두께는 날이 갈수록 두터워졌다.

어느 날, 런런쇼가 감독을 해 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너무 좋아 내 영화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였다. ‘인간의 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독할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하였다. 날아갈 듯 기뻤다.

우선 가지고 온 트렁크에서 한국 문학전집을 송두리째 꺼냈다. 그 안에 분명히 길이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하길종 감독의 데뷔작이 될 <화분> 은 이때 준비된다.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드디어 ‘그들’이 오게 되었다. 런런쇼가 넌지시 이야기했다. “허밍쭝, 너, 이제는 외롭지 않을 거야. 네가 소원한 한국 식구들이 내일 홍콩에 도착해. ” 밤잠을 설친 나는 다음 날, 새벽같이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내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있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나를 보며 밝게 웃었다.

“허밍쭝, 니, 흥 까우신 마? (하명중, 니 기분 엄청 좋구나.)”

“뛔!!... 뛔라!! (그래, 그래.)” 나는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한국군단을 향해 태극기를 높이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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