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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로미오와 줄리엣, 폴란드의 밤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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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로미오와 줄리엣, 폴란드의 밤을 적셨다

입력
2008.05.13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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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로미오를 발견하고, 재회한 두 사람은 기쁨의 2인무를 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독약 기운이 퍼진 로미오가 숨을 거두고, 줄리엣도 칼로 가슴을 찔러 뒤를 따른다.

눈을 감은 로미오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 안간힘을 쓰던 줄리엣은 처연하게 로미오의 위로 쓰러지고 만다. 조명이 꺼지고 무대 막이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극장에는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객석에서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무대 위에 겹쳐 누운 로미오와 줄리엣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때, 객석은 기립 박수의 물결이었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관객들의 박자를 맞춘 박수가 10여분간 이어졌다.

8일 밤(현지시간) 폴란드 비드고슈츠의 노바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제15회 비드고슈츠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유럽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러시아 거장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 안무로 국립발레단이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 이었다.

토룬에서 온 엘즈비에타 자멤포씨는 한국 기자를 보자 대뜸 손을 잡더니 “수페르(최고)!”를 외쳤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극장을 빠져나온 에우게니아 부조라씨는 “두 연인이 함께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의 진심이 전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음대생인 필라르스카 알렉산드라씨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 그저 로맨틱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역동적인 남성 무용수들의 춤이 멋졌다. 티볼트가 죽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고, 미하일 그라니스키씨는 “낯선 한국 발레단의 공연에서 국제적 수준의 춤을 접할 줄은 몰랐다. 프리마 발레리나(김주원)가 특히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은 붉은 색의 캐플렛가와 푸른 색의 몬테규가의 싸움 장면으로 열렸다. 화려한 군무가 지나간 뒤 요정 같은 모습의 줄리엣 김주원이 등장하자 탄성이 새어나왔고, 웅장한 캐플렛가의 파티 장면에서부터 큰 박수가 이어졌다. 무대 전환없이 배경막을 바꿔가며 변화를 주는 방식의 단순한 무대였지만, 섬세한 심리 묘사로 캐릭터를 살렸다.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에 빛나는 김주원의 연기는 발랄한 소녀부터 성숙한 여인까지 진폭이 넓었다. 잠드는 약을 마신 뒤 환상 속에서 로미오를 만나고, 티볼트와 머큐쇼의 망령과 마주치는 장면에서는 사랑의 환희와 절망을 오갔다.

이 무대를 마지막으로 뮤지컬 배우로 전업하는 정주영은 혼신을 다한 연기로 공감을 얻었고, 티볼트 이영철의 강렬함과 머큐쇼 이충훈의 기교, 캐플렛 부인 윤혜진의 카리스마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날 위경련으로 병원에 실려갔던 단원까지 무대에 나설 만큼 열의가 큰 무대였다.

비드고슈츠 오페라 페스티벌은 오페라가 주를 이루지만, 네덜란드댄스시어터, 스톡홀름 쿨베리 발레단,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발레단 등 유명 무용 단체들도 다녀간 축제다. 지난달 26일부터 11일까지 열린 올해 축제에는 폴란드 국립오페라극장을 비롯, 9개 단체가 참가했다.

국립발레단은 동양 단체 최초로 이 축제에 초청받았으며, 1주일 전에 8, 9일 양일 공연의 1,600석이 모두 매진될 만큼 높은 관심을 받았다.

국립발레단은 97년부터 해외에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자비를 들인 홍보성 공연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폴란드 우츠 발레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백조의 호수> 의 성공으로 폴란드에서 인지도를 얻었고, 이번에는 8만 달러의 개런티와 체제비를 받는 좋은 조건으로 초청됐다.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은 “내년에는 바르샤바에서도 공연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제는 외국 안무가의 작품이 아닌, 우리의 창작 발레로 세계에 나갈 때”라고 말했다.

비드고슈츠(폴란드)=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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