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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 방한, 황석영과 '경계와 조화' 주제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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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 방한, 황석영과 '경계와 조화' 주제 대담

입력
2008.05.13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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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56)이 방한했다.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한국을 찾은 지 3년만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ㆍ대산문화재단의 초청을 받은 파묵은 12일 오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출판협회(IPA) 서울총회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했고, 오후엔 강남 교보문고에서 기자 간담회, 독자 사인회, 소설가 황석영씨와의 대담을 소화하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13일엔 오후4시부터 광화문 교보생명빌딩에서 공개 강연회를 갖는다.

“내 문학은 우리 안의 금기 허물기”

12일 오후1시30분부터 1시간쯤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파묵은 “콜롬비아대에서 매년 가을학기 강의를 맡아 이스탄불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며 “한국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 6년간 썼던 장편 <순수박물관> 최종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와서 홀가분하다”고 근황을 전했다.

그의 여덟 번째 소설 <순수박물관> 은 터키 상류사회 남자와 그의 가난한 친척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로, 1975년부터 현재까지 변화하는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05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1차대전 중 터키가 자행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판했던 파묵은 “3년새 집 앞을 지키는 경찰들이 더 많아졌다”면서 “특히 내가 터키의 유럽공동체(EU) 가입을 옹호하는 발언을 자주 한 까닭에 EU 가입에 반대하는 급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 발언은 사실 정치적 문제라기보단 언론의 자유에 관한 문제”라면서 “사상의 자유를 표현하는 걸 막는 상황이 너무 화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파묵은 자신의 문학적 지향을 ‘우리 안의 금기 허물기’라고 정의했다. 그는 “사람들은 남이 지적해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어떤 금기와 억압에 종속돼 살아가는지 깨닫지 못한다”며 “우리가 사소하게 치부하면서 간과하는 것들을, 세심한 관찰을 통해 지적하고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말했다.

이어 “작가들은 으레 고통스럽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말하지만, 사실 남에게 이해받고 소통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56개국어로 작품이 번역된 파묵은 “나라별로 인기 있는 작품이 다르다”면서 “정치적 이슬람주의에 관심 많은 구미에선 정치소설 <눈> 이, 문화적으로 친연성 있는 스페인에선 에세이 <이스탄불> 이 많이 팔렸고, 한국과 중국에선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내 이름은 빨강> 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번 방한에 맞춰 국내 번역된 <이스탄불> 에 대해선 “스물다섯까지의 내 성장기이자 나고 자란 이스탄불에 대한 감상기”라며 “22세 때까지 화가를 꿈꿨고 대학에선 건축을 전공했던 내가 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이 책을 쓰며 스스로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황석영씨와 두 시간 열띤 대담

이날 오후4시엔 파묵과 소설가 황석영씨가 ‘경계와 조화’를 주제로 2시간 대담을 나눴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씨가 사회를 맡았다. 파묵은 작가로서 순수한 본연의 자세를 주로 강조했고, 황씨는 서구 지향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기반해 발언했다.

파묵은 “소설가에겐 다양한 삶의 경험보단 그 경험을 다른 시선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 더 소중하다”면서 “정치사회적인 것부터 미학적인 것까지, 그런 참신한 관점을 가로막는 금기를 깨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말했다.

황씨는 “문학의 보편성이란 미명 하에 서구문학이 일방적으로 던져주는 형식, 화법을 극복해야 한다”면서 “각자의 삶에 걸맞은 목소리를 내며 공존하는 다원주의가 내 후반기 문학의 지향”이라고 말했다.

“한국, 터키 모두 강한 민족주의와 서구 지향성이 공존하는 창작 환경”이란 사회자의 지적에 파묵은 “1990년 <검은 책> 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소설은 기본적으로 서양적 장르’라는 믿음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형식적 틀을 터키 및 이슬람 전통 스타일과 버무리는데 초점을 맞췄었다”면서 “하지만 35년 동안 소설을 쓰는 동안 서구와 지역을 따지는 이분법적 고민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이 말에 황씨는 “작가란 국가, 민족 등 어떤 경계에도 구획되지 않는, 오직 모국어가 조국일 뿐인 존재”라고 화답했다. 이어 “4년반 동안 런던ㆍ파리에서 거주하다가 귀국한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한국에서 창작하는 일에 답답함을 느낀다”며 “얼마전 문학 행사 참가차 발리에 갔는데 그 자유로운 풍광을 보면서 강남 형성사와 철도원 3대(代) 이야기를 다루겠다는 차기작 구상을 모두 접었다”고 말했다.

‘디아스포라’ 문제도 화제가 됐다. 황씨는 “<바리데기> 를 쓰면서 한달간 북한-중국 국경에서 취재했는데, 무려 20만 명의 탈북자가 중국, 유럽, 심지어 미국에까지 흩어져 불법 노동자의 신산한 삶을 살고 羚駭蔑구庸?“이주노동자 문제는 세계가 신자유주의로 재편되면서 여기에 적응 못한 국가의 문제로, 받아들인 자들의 이해와 관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파묵은 독일의 터키 노동자 차별과 터키 내 쿠르드족 억압 문제를 비교하며 “어느 쪽이 더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 “이런 인종주의적 태도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문제”라며 개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두 작가는 이어 ‘작가에게 문학적 고향이 있는가’를 논했다. 파묵은 “유네스코 통계에 따르면 세계인의 97%가 나고 자란 국가에서 죽는다고 한다”면서 “어떤 문화권에서도 통하는 무국적의 걸작도 있지만, 나는 문학의 고향인 이스탄불을 벗어날 수 없는 작가”라고 말했다.

황씨는 “만주에서 태어났고, 망명을 비롯해 외국에서 10년, 호남에서 10년, 이렇게 떠돌다보니 내게 문학적 고향이라 부를 곳이 없다”며 “그래서 나는 토박이 이야기꾼이 아니라, 도처의 이야기를 열심히 물어 나르는 외방 이야기꾼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문학의 미래를 낙관했다. 황씨는 한국 출판시장과 매체 환경 변화를 언급하면서 “신진 작가 소설집이 1만 부 이상 팔릴 만한 독자층이 존재하고 인터넷이 활자 매체의 부진을 만회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한국 문학은 쉽게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묵은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가 있다면 무언가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인류 역사 어디나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씨가 파묵의 작품 <내 이름은 빨강> 을 언급하며 “풀, 물감까지 화자로 나서는 다중적 이야기 구조가 우리의 민담을 닮아 낯설지 않았다”고 말하자 파묵은 “내 소설이 터키 전통에 기반했기 때문에 서구에선 안 읽힐 거라고 하는데 사실 터키인도 터키 전통을 모른다”면서 “전통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작가에게 빚이 되지 않는다. 작가의 빚은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을 깊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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